웹진

image

  

[노동] 인간에게 변태기는 없는가?

김정대SJ 121.♡.235.108
2022.05.16 15:04 2,372 0

본문

  

제목을 입력하세요 (20).png

  

나의 인생 여정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내가 아니라 내적 나에 관한 지식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관심이 많다.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해 보겠다. 나는 어려서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았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착한 아이가 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좀 싫었다. 그리고 나는 부모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과잉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착한 아이와 나 사이의 괴리가 생긴 것이다. 어린 내가 나의 바람과 생각을 엄마와 아버지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명하려 해 보아도 어른들, 특히 아버지는 나의 바람과 생각을 권위적으로 쉽게 뭉개버렸다. 이런 기억과 상처 때문에 나는 나이 들어서도 권위를 대하는데 조금 미성숙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기억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었다.

 

나의 60년의 삶의 여정 안에서 두려움과 불안은 단순히 외부에서 나에게 주어진 마음의 동요가 아니었다. 많은 경우 두려움과 불안함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과 불안함은 나의 어린 시절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무의식중에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셨던 아버지에게 무언가 좋은 결과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험이나 어떤 행사를 앞두고 좋은 성적이나 입상과 같은 좋은 결과를 성취하려고 무척 긴장하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보일 때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할 때도 긴장했다. 내가 세례를 받고 처음 대중 앞에서 독서를 할 때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떨었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미성숙함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는 나의 어린 시절 형성된 어린 자아가 있다. 이 아이는 아이로서 감당하지 못하는 책임감으로 인하여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는 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을 못하였고 그래서 어른들의 권위적인 요구에 화가 난 아이였다. 이제 나이가 들었어도 어떤 힘든 일을 대면할 때면 여전히 내 안의 어린아이가 책임감 때문에 두려워하여 일을 회피하도록 나를 유도한다. 그렇다고 내가 책임감 때문에 일을 맡게 되면, 그 아이가 어릴 때 어른들이 권위적으로 그 아이를 대했던 것과 같이, 나는 두려워하는 그 아이를 무시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일을 하는 동안 즐거움이 없이 우울한 가운데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린 자아가 원하는 방식에 동의하면 나는 책임을 피하며 미성숙한 행동을 하게 된다. 내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그 어린 자아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어린 자아와 대화해야하고 타협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는 나에 대한 성찰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는 성숙해지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다. 고맙고 행복하게도 나의 예수회 수도생활은 나를 알아가고 나와 화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여정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회이다. 오히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주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관심이 더 많은 사회이다. 대통령, 장관, 검사, 선생, 사장, 등등 사람의 이름 뒤에 늘 이런 직책이 따라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형제자매 사이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관계를 말하는 형, 누나, 언니, 오빠로 부른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불필요하고 오히려 자신을 좋은 형이나 누나로 착각한다.

 

아마도 이런 문화 환경 때문에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더 높은 직책이나 직업을 소유하기 위해 목을 매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신 대학 서열을 나누고, 자신의 사회적 관계망을 이용하거나, 비용을 지불해 논문을 대필하여 자녀들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스펙을 쌓아주고, 고액의 사교육에 비용을 지불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고가의 옷으로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저가의 옷으로 자신의 소박함을 그 지위에 덧씌우며 자신의 잘남과 우월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외적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직책, 직업 그리고 학력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수도복이 그리고 사제직을 수행할 때 착용하는 제의가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도복과 제의는 어떤 면에서 껍데기이다. 진정한 나는 그 수도복과 제의 뒤에 있다. 내가 껍데기를 벗고 하느님이 원하는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살 때, 나는 그 수도복을 입고 더 올바른 수도생활을 하게 된다. 또 나는 그 제의를 입고 더 올바로 사제직을 수행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외모와 직책, 직업 그리고 학력도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껍데기가 되지 않으려면 그 외모를 한 그 사람이, 그 직업을 가진 이가, 그 직책을 수행하는 이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도 변태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직업과 직책 그리고 학력은 폭력적인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나의 잘남을 자랑하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열이 생기고 경계가 생긴다. 그리고 위계를 강조하는 권위주의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부족함, 아니 적어도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면 타인들은 나에게서 겸손함을 본다. 그리고 관계는 친밀함이 생긴다.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있는 그대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사회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와 반대이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서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사는 사람에 대한 뉴스와 이런 껍데기를 의도적으로 찬양하는 뉴스를 접한다.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은 있으되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건강한 사회인가?

 

 

김정대 신부 (예수회)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