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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브뤼기에르 주교를 생각하며

조현범 121.♡.235.108
2022.04.13 17:09 2,74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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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카르카손 교구의 나르본 근교에 있는 레삭 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작농이었던 프랑수아와 테레즈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지요.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카르카손으로 가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마쳤습니다. 1815년 12월 23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대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아시아의 먼 땅에 가서 이방의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25년 9월 17일 33세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습니다. 4개월 반 동안 선교사가 되기 위한 소양 교육을 마치고 1826년 2월 5일 보르도 항구로 갔습니다. 목적지는 시암 선교지였습니다. 오늘날의 지명으로는 태국입니다. 1827년 6월 4일 방콕에 도착하여 시암 대목구 선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시암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무렵, 교황청에는 조선의 교우들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유진길과 정하상 등이 쓴 편지에는 조선에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간청이 들어 있었습니다. 포교성성 장관이던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 교우들의 정성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선교지를 북경 교구에서 분리하여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조선 선교지를 맡아줄 선교회를 구할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어 조선을 맡겠느냐고 문의하였습니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는 인적 및 물적 자원이 부족하고 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완곡하게 거절하는 편지를 로마에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소속 선교사들에게 교황청의 제안을 알렸습니다.

 

파리 본부에서 보낸 서한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브뤼기에르 신부는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만일 지원자가 없다면 자신이 가겠다는 의사도 담았습니다. 교황청에도 편지를 보내어 조선 교우들의 바람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자기가 조선으로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당시 시암 대목구의 장상이던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를 자신의 후임자로 삼을 계획이었습니다.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 그를 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신부의 열정에 감동하여 그를 조선에 양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어 새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가는 것에 동의한다고 알렸습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선출되자,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를 신설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는 칙서를 반포하였습니다.



조선을 향하여 대륙을 종단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말레이 반도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페낭(Pinang)에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1832년 7월 25일 파리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자신이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었음을 알게 되자 지체하지 않고 조선으로 출발하였습니다. 8월 4일 페낭을 떠나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서 마카오로 갔습니다.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성 대표부를 찾아가서 교황 칙서를 건네받았다. 12월 19일 무렵 마카오를 출발하였습니다. 행선지는 복건 대목구장 카르페나 디아스 주교가 있던 복건성 복안현이었습니다. 조선 교우를 만나려면 북경으로 가야 하는데 중국 내지에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했던 것이죠.

 

배를 타고 마카오를 떠났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3월 1일 복안현 정두촌에 상륙합니다. 복건 주교관에 기거하면서 북상 계획을 세운 뒤에 7월 20일 다시 배를 탔습니다. 절강성 북부 해안에 상륙하여 운하를 따라서 내륙으로 들어간 다음에 남경 근처에서 양자강을 건넜습니다. 7월 31일부터 육로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절강성에서 산서성의 경계까지 뻗은 화북 평원지대를 걸어서 지났습니다. 8월 13일에는 황하를 건넜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드디어 산동의 어느 교우 마을에 간신히 도착하였습니다.

 

1개월 정도 앓아누웠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간신히 회복하자 북경에 연락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오는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서 북경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박해가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 안전한 산서 지방으로 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 대목구장이 거주하던 산서의 태원부 기현 구급촌이라는 작은 마을로 갔습니다. 1833년 10월 10일에 산서 주교관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 대목구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약 1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조선을 그리며 선종하다

 

1834년 9월 22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 대목구의 요아킴 살베티 주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서만자 교우촌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서만자는 북경에서 가까워서 조선 교우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훨씬 쉬운 곳이었습니다. 10월 8일 서만자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년 동안 서만자 교우촌에 머물면서 연락원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조선 교우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교우들은 서한을 보내어 1835년 연말에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교를 반드시 조선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1835년 10월 7일 마침내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가는 길을 나섰습니다. 우선 만주 봉황성 부근의 변문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조선 교우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10월 19일 마가자 교우촌에 도착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음 날 저녁에 갑자기 몸의 이상 증상을 느꼈습니다. 페낭에서 만주까지 이어진 3년의 여정으로 누적되었던 과로가 뇌출혈을 일으킨 것으로 짐작됩니다. 결국 브뤼기에르 주교는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경에 43세로 선종하였습니다. 마가자 교우촌의 산기슭에 쓸쓸히 묻혀 있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 용산 성당의 성직자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왜 브뤼기에르 주교인가

 

맞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조선 교우를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수행원을 북경으로 보내서 조선 교우들에게 주교가 왔음을 알리고 입국 방도를 의논하였을 뿐이지요. 그러니 브뤼기에르 주교가 만져본 것이라고는 입국할 때 서양인 외모를 가리는 데 쓰시라고 조선 교우들이 삼베로 지어서 보낸 상복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업적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조선 대목구가 설치될 수 있었고, 조선 교회는 보편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사제가 없었던 시절에 교회를 이끌고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푼 이들은 바로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서 선교지 조선으로 왔던 후배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평전을 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래도록 묵혀 두었던 숙제를 이제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끝내고 성주간에 접어들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여러분도 미루어 둔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렇다고 영웅의 일대기를 쓸 생각은 없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지나치게 미화한다거나 마치 순교자인 양 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의미 있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도록 브뤼기에르 주교가 살았던 시대를 염두에 두면서 그가 품었던 열정과 사랑,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헌신과 지혜 등을 차분히 기록할 생각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이 지금의 신앙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조현범 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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