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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구유’에서 본 공공성

조현철SJ 121.♡.235.108
2021.12.30 17:03 2,39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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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있어야 할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롱, 책상, 의자, 그릇 같은 살림살이는 집에서 쓸 때는 소중하고 요긴하지만, 집 밖으로 나오면 영 다르게 보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포장이사라 별로 볼 기회는 없지만, 집에 있을 때는 멀쩡하던 가재도구가 이사한다고 바깥에 잠시만 나와도 웬지 초라해보입니다. 이사할 때도 그러니, 철거를 비롯해 어떤 연유로든 강제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 살림살이는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몰골로 변합니다. 살림살이는 살림하는 집에 있을 때 제 모습입니다.

 

응급환자는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는 응급실로 가야 하고, 입원이 필요하면 병실로 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예외적으로 이렇게 할 수 없는 때가 있었다면,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이렇게 하기가 정말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리 부족으로 응급환자가 병원을 전전하며 구급차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수가 많아졌고, 열이라도 나면 상황은 정말 심각해집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갓난아기가 있어야 할 곳은 따뜻하고 아늑한 방입니다. 설사 집이 그렇지 못하다 해도, 아기가 있을 곳만은 집안에 따뜻하고 아늑하게 마련해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있어야 할 곳은 그런 곳입니다. 성탄을 알리는 복음에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이야기를 듣고 만삭의 몸으로 몸 풀 곳을 찾을 수 없었던 마리아와 요셉의 처지와 심정을 생각해봅니다(루카 2,12).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선포한 호구등록 명령을 이행하려고 만삭의 몸으로 낯선 곳에 간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만삭이든 뭐든 개인 사정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사람을 강제동원하는 것이 국가 권력의 실체이고 관료제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몰리니 방이 없습니다. 사실은 방이 없다기보다는 방값이 터무니없이 비쌌을 겁니다.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은 돈 많은 사람과는 대체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집과 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살 돈과 힘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글로벌 곡물 메이저들은 곡물 가격을 유지하려고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곡물을 밥 먹듯이 폐기 처분합니다. 돈과 힘이 과점하거나 독점하고 있기에 있을 곳과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아니, 지금이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혹독할 것입니다.

 

부자 나라는 백신을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을 선점하고 있다가, 사용기한이 다 되어가자 가난한 나라에 줍니다. 결국, 아무도 쓰지 못하고 폐기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팬데믹, 세계적 유행병입니다. 어차피 가난한 나라가 백신이 없어 감염이 계속되고 바이러스 변이가 계속되는 한, 사태가 종식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백신 제약회사들은 제조 원가보다 훨씬 비싸게 백신을 판매하여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데 정신이 없고, 부자 나라는 입도선매로 자기만 살려고 합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한 후 하느님께 바쳤던 찬미의 노래입니다. 마리아는 권력자와 힘없는 자,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나란히 함께 놓음으로써 정확하게 현실의 질곡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말합니다. 권력으로써의 는 가난을 필요로 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집은 많지만, 몸 풀 곳 하나 구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 속에서 마리아는 자기가 노래했던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절절히 느꼈을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있을 곳이 주체할 수 없게 넘쳐나고, 힘이 없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하나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누군가 딱하게 보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제공했을 구유가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환대와 호의를 베풀기 위해 꼭 무엇이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쓰지 않고 가지고 있던 그런 구유로도 무언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구유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도움을 서로 주고받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구유의 아기는 이런 일이 정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살림살이를 집안에 둘 수 있게 하라.” “응급환자는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라.” “갓난아기와 산모에게 구유가 아닌 따뜻하고 아늑한 곳을 마련하라.”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으려면, 사회의 공공성 회복이 급선무입니다. 지금도 전체적으로는 있을 곳과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누군가 과점하거나 독점해서 부족할 뿐입니다. 구유에서 가시화된 강생’,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공공성의 확충을 촉구합니다. 정부가 주력할 것은 부의 총량(GDP)의 증가가 아니라 공공성 향상입니다. 주거, 의료, 교육의 공공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봄종사자, 간호사, 버스 운전기사, 기계 정비공, 소방수, 교사 같은 사람들이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는 데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만, 이들에 대한 존중과 대우는 형편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공공성의 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안전하게 유지되려면 이런 사람들이 중요하고 거기에 합당하게 존중받아야 합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인류학자이자 사회활동가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ver)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불쉿 잡(bullshit job)’이라고 부릅니다. 그레이버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는 이런 쓸모없고 무의미한 직업이 많이 있고 심지어 점점 증가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레이버가 불쉿 잡으로 규정한 정치 컨설턴트, 로비스트, 기업 변호사, 광고·마케팅 전문가 같은 직종은 없어져도 세상 돌아가는데 별문제가 없지만, 이런 사람들이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정상이 아닌 세상입니다. 이런 비정상을 바꾸어 공공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존중받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인 세상은 비정상이다. 그러니, 바꾸라!” 하느님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당부인 듯합니다. 아기 예수를 받아 안은 구유는 모든 피조물이 자기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그래서 어둠 속을 걷던이들이 하느님이 주시는 큰 빛을 볼 수 있는 세상(이사 9,1), 하느님이 바라시는 세상을 만드는 데 우리가 힘을 모으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빕니다.

 

 

조현철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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