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image

  

[평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스테파니살다냐 58.♡.237.175
2021.05.18 20:55 4,980 0

본문

20210518165933_17c8d6618540066dfa6bfc462c523de6_qn4b.png

 

어제 나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골고타로 걸어갔다.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골목에는 유령같은 적막함이 흘렀다. 길에서 반짝이는 새 옷을 입은 어린 소녀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옷은 라마단의 끝을 알리는 무슬림 축제의 예복이었다. 적막한 길을 걷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내 마음이 바스라졌다. 가자지구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폭력이 횡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고 가게와 회당이 불타고 있다. 매일 매일 사망자와 부상자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 교회가 열려있다.

 

나는 십자가 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향할 유일한 장소, 십자가. 그리고 지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분,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 밑. 나는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날과 같은 십자가의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셨다. “당신 손에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넘어선 사랑이시다. 더이상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을 때조차도 사랑하셨다. 마지막까지 사랑하셨다. 십자가 밑에서 다시금 깨달음을 얻는다. 사랑은 가장 힘든 것이지만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지난 몇 주 동안 팽팽했던 긴장은 동예루살렘 세이크 자라 인근의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집에서 퇴거당할 위기에 처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주 초 이스라엘 대법원은 예루살렘의 세이크 자라의 팔레스타인 가족들의 퇴거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위해 심리를 앞두고 있었다. 문제의 팔레스타인 가족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된 이후 예루살렘의 지금 장소에서 몇 세대 동안 살고 있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살던 집들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1948년 이전의 토지 소유권을 유대인의 경우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스라엘 법 때문에. 하지만 그 이스라엘 법은 팔레스타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법이 참 편리하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셈이다.

 

대법원 심리가 다가오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라마단의 마지막 금요일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것도 바로 수천 명의 무슬림이 기도하러 모여든 알 아크사(무슬림의 3대 성지 중의 하나)말이다. 지난 월요일, 대법원 심리가 예정된 날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1967년 예루살렘 수복을 기념하는 예루살렘의 날,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계열 정착민들이 이스라엘 경찰의 호위 속에서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며 통과했다. 매년 이날은 긴장이 높았지만 올해는 특히 높았다. 이날 아침 이스라엘 경찰이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 알 아크사 모스크를 급습하였다. 십여명의 경찰관과 3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곧 하마스는 이스라엘 병력이 알 아크사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가자지구에서 로켓을 발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제 지금 가자지구는 전쟁 중이다. 사상자가 급증하였고 7년 만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최악의 전투가 발생했다.

 

최근 나는 예수회원인 월터 부르가르트 신부가 쓴 관상의 정의를 읽었다. 그에 따르면 관상은 실제를 천천히 그리고 사랑 가득히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애초부터 사랑 가득히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다.

 

이 실제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최근 이스라엘을 둘러싼 폭력은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해준다.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은 멈춰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내가 이스라엘을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을 편든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반대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편들지도 않는 제3의 입장이 있는 법이다. 이 입장은 사랑, 특히 정의에 뿌리를 내린 사랑, 팔레스타인이 해방되기 전까지 예루살렘의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랑의 입장이다. 팔레스타인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이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며 가장 큰 값은 아이들이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루살렘이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유대인을 위한 모두의 거룩한 도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예루살렘이 거룩한 이유는 모두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루살렘의 모스크나 교회는 박물관이나 여행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모스크나 교회는 이곳의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공동체가 매일 공경을 바치는 거룩한 곳이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토착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신앙을 살아가고 내 무슬림, 유대인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나의 성소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다인종성과 다종교성이 위협받는 것은 퇴거 위기의 팔레스타인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서 모두와 함께 살아가는데 힘쓰고 있는 모든 이들,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 하나 하나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폭력이 끝나기를 바란다. 전쟁과 폭탄, 로켓의 폭력, 공동체에 가해지는 폭력, 더 나아가 구조적인 폭력의 종식을 바란다. 우리 마음에 가해지는 폭력까지도.

 

이제 나는 골고타로 향한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로 향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으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를 폭격했다.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1,800발의 로켓을 쏘았다. 팔레스타인의 보건당국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 126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 중에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수천명이 집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늘 그렇듯이 가장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이다.

 

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이 늘 주저된다. 물론 몇 년 동안이나 이곳에 살면서 자식들을 길러왔고, 이곳의 사람들, 무슬림들,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러 면에서 나는 이 갈등의 국외자이다. 나에게는 이 곳 사람들이 살면서 얻게된 그 상처가 없다. 오래 전에 나는 이 상처야말로 이 사람들에게 내가 갖지 못한 권위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침묵의 대가가 너무 커졌다. 나는 감히 내 이웃들을 대변하지 않으련다. 나 자신을 대변해서 말하겠다. 예루살렘 인구의 고작 1-2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한 사람인 나 자신을 말이다. 나는 어떤 힘도 없다. 하지만 이 무력한 때에도 어딘가에는 힘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마치 기도가 하찮은 것인 듯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할 것 같다. ‘나는 기도할 수 있어.’ 어떤 힘도 없다면 기도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금 기도를 믿어야 한다. 우리 기도가 닿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기도해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라보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내 시선 밖에 누군가를 두게 된다면 나는 바라볼 수 없다. 복음 속 예수님의 시선은 얼마나 넓은가. 예수님은 누구도 빠짐없이 바라보셨다. 기도 속에서 시선을 넓히려고 노력한다. 가자지구의 죽은 아이들과 부모, 이웃들을 바라보려고 애쓴다. 형제, 자매, 부모의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무너진 건물과 학교를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길 위에 나동그라진 부상자들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슬퍼하려고.

 

국경 마을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방공호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 아이들을 대피시키려고 달려가는 엄마의 두려움. 이 폭력이 세대를 두고 트라우마를 안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죽거나 다치거나 트라우마를 입은 이들부터 이들에게 두려움의 씨앗을 뿌리고 심지어 죽이려는 이들까지 시선을 넓혀보자. 한없이 시선을 넓히다보면 경계가 사라진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때 찾아올 자유는 오직 갈등을 통해서 얻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 위의 사랑이다. 알제리에서 순교한 크리스티앙 드 셰르제 복자를 성탄 전날 사야 아티야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미 몇몇 외국인들을 살해한 적이 있던 극단주의자 아티야가 의약품을 요구했고 셰르제는 거절했다. 뜻밖에도 그는 수도사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났다. 나중에 드 셰르제는 이렇게 썼다.

 

내가 그를 위해 무슨 기도를 할 수 있을까? 나는 하느님께 그를 죽여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는 청할 수 있다. 그를 무장해제시켜달라고.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과연 나는 그의 무장해제를 청할 권리가 있을까? 오히려 먼저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무장해제시켜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를 무장해제시켜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무장해제시켜주소서. 이것이 드 셰르제 수사의 기도였다. 그리고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전쟁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미움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폭력의 방관자가 될 수는 없다. 나로서는 그런 시늉은 차마 못하겠다. 우리 모두는 무장해제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미 타오르는 불길에 미움 한 줌을 더하는 꼴이 될테니까.

 

나는 모두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이 갈등에 대해 반응할 때 이 반응은 사랑에서 나온 것인가?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랑이 우리의 행동을 움직이고 있는가? 내가 말하는 사랑은 미약한 사랑이 아니다. 강력한 사랑, 정의를 열망하는 사랑이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하는 사랑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중립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이 갈등 당사자 누구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도 인간성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사랑이 빠진 말을 하면 우리는 그토록 닮고 싶어하는 그 분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미움을 더할 수는 없다. 지금 이미 미움은 충분하니까.

 

자신을 무장해제하자. 그리고 그들을 무장해제하자. 우리 모두 무장해제하자. 우리는 십자가 밑에 서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한다.

 

스테파니 살다냐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작가)

이 글은 아메리카 매거진에 514일 기고된 원고를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A Christian in Jerusalem at the Start of Another War | America Magazine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