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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모든 형제들>, 닫힌 세상을 활짝 열고 (2)

조현철SJ 121.♡.116.95
2021.05.06 15:57 3,49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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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역설

세계화의 세상은 역설적입니다. 세계화로 우리는 초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파편화되었습니다(7). 시공간을 압축하는 세계화로 전 세계는 물리적으로 촘촘히 연결되었지만, 개인과 사회의 건강한 삶의 바탕이 되는 상호협력과 존중의 관계는 낱낱이 해체되었습니다. 세계화는 결국 통제와 지배와 착취의 전 지구적 확대입니다. 세계화로 세계의 다양한 문화는 미국 중심의 서양 문화로 획일화됩니다. “이러한 [단일] 문화가 세계를 획일화시키는 한편 개인과 나라들을 갈라놓습니다. 사회가 더욱 세계화되면서 우리는 서로 이웃이 되지만 형제가 되지는 못합니다”(12). 슬프고 무서운 일입니다.

 

세계화 과정은 세계 각 지역에서 오랜 세월 보존되어 온 각종의 전통적 유대를 제거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자연과 분리되고, 세대가 단절되고,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의 정체성이 붕괴됩니다(헬레나 노르베리-호지, “현대화와 세계화의 압박”, <위대한 전환> 67). 세계화가 초래한 것은 결국 삶과 문화의 획일화였습니다. 세계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열등하게 여기고 서양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동경하게 만듭니다. 후기 산업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로 강박적이고 집착적인 소비주의 문화가 세계에 만연하게 되지요(<찬미받으소서> 203). 더 많이 소비할수록 좋은 삶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며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는데 몰두합니다. 경쟁이 격렬해질수록 타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듭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모르고 눈물을 흘리지않게 되었습니다(<복음의 기쁨> 54). 세계화는 화려하지만 무감각한 세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오늘 우리의 이야기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이 사람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당시의 종교 관습에서, 피 흘린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일상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지나치는 길을 선택했지요. 아마도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지만 마음속에 공동선에 대한 사랑은 지니지 못하였습니다”(63). 문제는 쓰러진 사람에 대한 무관심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노상 강도들은 흔히 반대쪽을 보면서 길을 지나쳐 가는자들과 은밀히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75).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침묵 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방관은 강도의 편을 들고 피해자를 죽게 만듭니다. 2014년 방한 후 귀국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언급했듯이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이 멈추어 서고 다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몸소 돌보아 줍니다. ... 무엇보다도 이 바쁜 세상에서 우리가 너무나도 애지중지하는 한 가지를 다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곧 자기 시간을 다친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63).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했습니다.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그러면 우리의 행동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상대의 처지에 선다면 무관심에서 벗어나 행동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나 상대의 처지에 서기란 결코 쉽지 않지요. 다른 곳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신이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언젠가 시각장애인인 아이들이 나에게 제가 교황님을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물론이지라고 대답했지만, 처음에는 그 아이들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묻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내 얼굴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한다는 걸 곧 알게 됐습니다. 그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저를 보았던것입니다”(<렛 어스 드림> 67). 시각장애인에게 사람을 본다는 것은 만지는 것을 뜻합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서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누워서 지내야만 하는 사람의 처지를 알 수 없습니다. 가까이 가서 봐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루카 10,33). 가까이 가서 쓰러진 사람을 보았기에 그 사람의 처지에 설 수 있었겠지요. 가엾은 마음은 그렇게 생겨납니다. ‘가엾은 마음의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σπλγχνον)’에서 왔습니다. 가엾은 마음은 애끊는 마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의 큰 고통에 동참하여 애끊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고통을 함께 느끼는 연민연대를 낳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연결되었습니다. 당시 유다와 사마리아의 첨예한 불화와 갈등과 대립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의 의미는 개인적인 선행의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두 민족 사이의 닫힌 세계를 활짝 열어젖히자고 호소합니다. 분리와 단절을 끝내라고 촉구합니다.

 

    

조현철 신부 (예수회)

 

 

조현철 신부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 해설 <닫힌 세상을 활짝 열고>는 2주에 한 번, 4차례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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