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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모든 형제들 TMI] 왜 교황님들의 문헌은 어려울까?

김민SJ 121.♡.116.95
2021.03.15 18:16 9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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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제들 TMI] “1장 닫힌 세상의 그림자


 

왜 교황님들의 문헌들은 어려운 것일까?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교황님의 회칙이나 교서들이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쓰신 글들이 손쉽게 읽혀지는 것에 반해서 전임 교황님들의 글들은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작년과 금년 초 수녀님들을 대상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봉헌생활에 관한 사도적 권고를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문헌을 함께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용어 하나가 있었습니다. ‘비잔틴적 복잡성 Byzantine complexity’이라는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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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몬레알레 대성당의 비잔틴식 모자이크입니다.

 사실 이 대성당은 12세기 시칠리아를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노르만족이 건설한 성당입니다.

 하지만 건축양식(천장은 제외)과 모자이크는 정확하게 비잔틴 방식입니다. 아주 복잡해 보입니다.

 

이 단어를 제가 알게 된 것은 움베르토 에코 선생의 기호학 이론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에코 선생은 통상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을 넘어서는 온갖 복잡한 다른 논리들에 의해서 메시지의 전달 자체가 혼란스러운 경우를 비잔틴적 복잡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에코 선생이 사용한 이 용어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관료제와 제국의 운영의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로마제국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한 가지를 새로이 덧붙입니다. 로마제국의 오래된 숙적인 동방제국-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방제국 특유의 전제정 체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질박했던 로마제국의 궁정문화가 굉장히 번잡스러운 궁정문화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황제를 뜻하던 카이사르의 칭호가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로 바뀌는 것은 덤이고 말입니다.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비잔틴적인 복잡성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어 했던 것은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번잡스러운 장치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왜 교황님들의 글은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이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면 이렇습니다. 일단 비교를 위해서 제가 그나마 면밀히 읽었던 봉헌생활과 비교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봉헌생활문헌의 경우 각주를 보면 무수한 교부들의 인용문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용문들이 본문의 뼈대를 이룹니다. 이에 더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수도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들을 언급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교부들의 인용문들이 난무하는 것은 교회문헌의 권위가 당연히 성경과 교회 전승에서 비롯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서 기인합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문헌들은 대개 성경과 교부들, 그리고 그 교부들을 사회에 적용시킨 교회문헌들의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둘째, 교황님들이 문헌들을 작성할 때에는 당신들이 염두에는 두는 독자들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봉헌생활에서 염두에 두는 독자들은 수도자들과 봉헌생활자들인데, 그런데 이들은 그냥 수도자들이나 봉헌생활자가 아닌 성경과 교회 전승에 해박한 지식을 갖는 이상적인 독자를 타겟으로 상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와 같이 배움이 짧은 독자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적인 독자들로서는 히야, 어떻게 이렇게 적절한 문헌들을, 구절들을 찾아냈다냐?’하고 감탄하는 지점에서 저와 같은 독자들은 대체 왜 이런 구절이 튀어나오는 것일까?’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들이 글을 쓸 때 그분들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가, 혹은 그분들이 상정하는 이상적 독자들이 누구인가는 글쓰기의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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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교황님이 건네는 메시지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사진은 201911월에 있었던 예수회 사회사도직 50주년 행사 참가자들의 교황님 알현 사진입니다.

 이 때 교황님은 페드로 아루페 신부님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알현자들이 예수회 사회사도직 종사자들이었기에 페드로 아루페 신부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교회문헌들과 오늘날 세속에 찌든 독자들 사이에는 꽤 넓은 거리가 놓여 있습니다. 교회문헌들을 읽을 때 올라오는 위화감이 이런 연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각주에 다른 교회문헌들이 없는 까닭은?

 

반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모든 형제들을 쓰시면서 염두에 둔 독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우리들은 사회의 구조적인 불의에 의해서 고통받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형제들에서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불의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교황님의 이상적인 독자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온갖 불의를 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형제들의 각주들을 보면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각주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들과 강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봉헌생활이 무수한 교부들과 교회문헌들의 각주로 이루어진 것과는 크게 대조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형제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과 이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논문의 독자가 신학적인 지식을 갖춘 이들이기에 이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신학적인 권위를 갖춘 글들을 논거로 삼는 것에 반하여 강론은 성당 안에 모여 있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상적인 언어로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황님의 이번 회칙은 그런 점에서 매우 사목적인사회회칙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모든 형제들은 각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신의 글들을 인용한 것 외에도 한 가지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우정과 보편적 형제애를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가치들의 적들 또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유주의, 쓰고 버리는 문화, 대중영합주의 등등... 꽤 많은 수의 반대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를 모든 형제들1장에서는 닫힌 세상의 그림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 1120일 교황청 기관지 옵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바셀리오스 클레미스라는 이름의 추기경이 쓴 글인데 여기에서 흥미롭게도 클레미스 추기경은 모든 형제들을 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하느님의 도성(신국론)’을 쓴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분 모두 세속사회에 대해서 불신을 표하고 이제 세속사회를 움직이는 정치를 그리스도적인 가치와 원칙에 따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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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셀리오스 클레미스 Baselios Cleemis 추기경입니다.

 의복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가톨릭이 아닌 동방가톨릭 가운데 시리아-말란카라 가톨릭의 대주교입니다.

 2012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에 의해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셨습니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전에도 현대사회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사회경제적인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일부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연재에서 다룰 것입니다. 과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받았는가?)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든 형제들의 경우 오히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의 역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신수련 기도법의 초반, 이 세상에서 작용하는 선한 하느님의 영과 악한 영의 움직임에 대한 묵상이 이 사회회칙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역동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이 빛의 영역, 선한 영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신자유주의와 쓰고 버리는 문화, 무관심의 문화, 대중영합주의 등이 어두움의 영역, 악한 영의 영역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바로 이렇게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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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화법 중에서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라는 화법이 있습니다.

 말이 어려운 이 화법은 이탈리아어로 빛(키아로)과 어두움(오스쿠로)의 합성어입니다.

 아마 모든 형제들의 글쓰기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처럼 빛과 그림자로 세상을 표현하는 키아로스쿠로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번 회칙이 다른 교황님의 회칙들과 달리 선명하게 이해되는 것도 바로 이렇게 세상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뜻과 이에 반하는 악한 영의 움직임들을 식별하는 방식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형제들이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라 쓰여졌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영과 악한 영의 관점에서 모든 형제들을 읽는다면 좀 더 쉽게 이 회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민 사도요한 신부 (예수회)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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