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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평화는 어떻게 낯선 이야기가 되었을까?

김성한 121.♡.116.95
2020.12.09 16:12 51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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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일인 것 같지만, 2018427일이었다.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 또 다른 전쟁에 관한 소문이 계속되던 2017년을 기억한다면, 이날 판문점에서의 만남은 큰 안도를 느끼게 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죽했으면 나도 그날 기쁜 마음으로 평양면옥에서 냉면 곱빼기를 먹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눈이 한반도, 판문점으로 쏠려 있던 그 시간에 타임지 인터넷 판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소개되었다. 기사 제목은 왜 남한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북한과의 관계가 편안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였다.1)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샬롬의 통치를 이야기했다. 예수도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비폭력의 모범을 보이셨다. 베드로도 바오로도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평화의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왜 이렇게 낯선 이야기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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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옮겨 볼 수 있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의 등장과 콘스탄티누스 전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변화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낯설게 되어버린 근본적 이유라 할 것이다.

 

1세기 그리스도교는 소수자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갔다. 로마 제국의 변방인 팔레스타인에서 출현한 유대교의 분파 정도로 취급되었던 원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비정기적으로 크고 작은 박해와 어려움들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그의 기념비적인 책 기독교의 발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10년마다 40% 성장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 이 성장률을 적용하면 AD 300년 로마제국의 전체인구를 대략 6,000만 명이라고 보았을 때 그중의 10%600만 명이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셈이다. 더 흥미로운 변화는 300년에서 350년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스타크는 AD 350년이 되었을 때 로마제국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로마제국의 서북쪽을 다스리던 콘스탄티누스(AD 272-337)가 서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크리스텐덤의 기초가 놓였다. 콘스탄티누스는 AD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 중 하나로 공인하였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교는 변방의 핍박받는 종교, 소수자의 종교에서 그리스도교인 황제의 인정과 지원을 받는 종교가 되었고, 훗날에는 드디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다. 불과 50년 사이에 로마 제국 인구의 절반이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는 놀라운 변화는 콘스탄티누스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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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역사적인 변화는 평화의 복음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박해받던 교회,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던 이들이 이제 겨우 음지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교회와 신자들의 삶을 둘러싼 상황과 사회의 극적인 변화는 교회의 제도와 실천에 영향을 끼쳤다. 교회의 가르침의 내용과 강조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에서 신자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삶을 돌이키고 바른 삶을 배우며(Orthopraxy), 바른 믿음의 내용을 배우고 고백(Orthodoxy) 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모든 교리화 과정(Catechism)은 수년에 걸쳐서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해를 받고, 손해를 입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선택과 참여가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그러나 이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인과 신자가 아닌, 예수의 제자로서 합당한 바른 삶의 방식과 바른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의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샬롬의 비전도, 평화의 복음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제 제국의 종교가 된 이상 교회는 제국 경영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에른스트 다스만(Ernst Dassmann)은 콘스탄티누스 전환에 대한 비판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한다 - (1)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한 진심, 그의 정통 신앙, 개인적도덕적 태도는 의심스럽다. (2)교회는 권력의 유혹으로 타락했다. (3)신약성경 규범들을 잃으면서 교회는 이교인의 종교성을 받아들였다. 폭력을 수반한 선교는 내적 개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개심과 개혁을 낳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으며, 원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활기는 스토아학파의 자연법적 윤리에 눌려 위축되었다 (4)‘콘스탄티누스 전환1,500년 이상 교회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운명적이었다.3) 이 콘스탄티누스의 전환 속에서 산상수훈을 따라 살라는 예수의 급진적인 초청은 크리스텐덤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대되는 바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만 적용/허용되는 것으로 전환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었던 하나의 윤리’(Single Ethic)가 있었다면 이제 이 윤리는 교회안의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이른바 평신도들에게는 그보다 낮은 세상의 윤리를 따라 살게 되었다. 교회 스스로 이중잣대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로마제국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제국의 권세가 교회의 복음을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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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국가로, 평화의 복음이 사라진 크리스텐덤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십자군 전쟁일 것이다. 대략 AD 1095-1289까지 총 9회의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과 그에 따른 유럽인(그리스도인)의 정복과 지배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지지했던 발견의 교리’ (Doctrine of Discovery)는 여러 교황들의 칙서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는 공식 이념이 된다.”4)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 신앙에 대한 이해를 쉽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십자군 전쟁에서 보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습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가 전한 복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메리카 대륙의 복음화를 이야기하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수탈했던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발견하기 어렵다.

 

평양냉면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은 평화를 낯설어하며, 반기지 않는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지난 10월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로운 사회 회칙모든 형제(자매)(Fratelli tutti)에는 지금까지 가톨릭교회가 견지해왔던 크리스텐덤에 기초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생각과는 사뭇 다른 가르침이 등장한다 

 

 

모든 전쟁은 우리의 세상을 이전보다 나쁜 상태로 남겨놓습니다. 전쟁은 악의 세력 앞에서 정치와 인간성의 실패이며, 수치스러운 굴복이며, 신랄한 패배입니다. 우리는 이론적인 논쟁의 늪에 빠져서 머물러 있지 말고, 희생자들의 상처 입은 몸에 손을 댑시다. 우리는 부차적인 피해라고 여겨지는 무고한 시민들의 살상을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희생자들에게 직접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방사능이나 화학무기 공격의 영향으로 고통 받는 난민들과 흩어진 사람들, 그들의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들과 불구가 되거나 그들의 유년기를 빼앗긴 소년과 소녀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의 희생자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그들의 눈으로 실상을 보고, 열린 마음으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전쟁의 중심에 있는 악의 심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평화를 선택한 이유로 순진하다고 여겨지는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261항)

(김성한 번역) 

 

그렇다. 교회는 평화를 낯설어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평화의 세력이 되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이는 누구나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1) Kelly Kasluis & Kevin Grant, April 26, 2018. “Why South Korea’s Conservative Christians Don’t Want to Get Cozier With the North” (https://time.com/5255850/why-south-koreas-conservative-christians-dont-want-to-get-cozier-with-the-north/)

 

 2) 로드니 스타크/손현선 옮김, 기독교의 발흥(서울: 좋은씨앗, 2016), 23. 

 

 3) 에른스트 다스만/하성수 옮김 교회사ll/1(왜관: 분도출판사, 2013), 29.

 

 4) 루이스 N. 리베라/이용중 옮김 복음 전도를 빙자한 폭력과 수탈의 역사-아메리카는 어떻게 기독교 세계의 희생제물이 되었는가?(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73.

     

 

     

  김성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 평화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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