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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난민] 홍수에 떠가는 컨테이너

이근상SJ 121.♡.116.95
2020.08.11 16:19 5,25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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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22.일 자 한국경제연구원 발표, 올해 태어나는 아이들이 40살이 되는 2060년이 되면 대한민국의 생산 가능 인구, 학령인구, 현역 입영대상자 수 등 국력을 상징하는 인구수가 절반 이하로 감소하는 반면, 노년부양비는 현재보다 4.5배나 증가할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은 반으로 줄고,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는 네 배 반 증가하리란 것. 이는 40년 뒤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날 일이 아니라 40년 동안 시나브로 더해진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는 사람은 조금 더 줄고, 부양해야 할 사람은 조금 더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 애를 많이 낳도록 더 장려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건 정말이지 게으른 몽상가의 말씀이다. 그동안 해 보았는데 진전이 없다면 이제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는 게 건강한 현실주의자의 사고방식이다.  

 

받아들이자.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에서 탈락한 지 오래되었다. 이 흐름을 다시 돌리는 건 많은 것이 바뀌어야 가능하다. 돌리기를 정말 원하지도 불분명하지만, 돌려보려 해도 그건 돈 몇 푼, 정책 몇 가지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출산율이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는 소위 선진국들, 그중에서도 많은 나라들의 출산장려정책의 성공사례처럼 회자되는 프랑스의 경우만 해도 통계적으로 무슬림 출산율을 따로 발표하지 않는 정책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 본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백인들의 출산율은 소위 나라 전체의 출산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많은 이들의 추측이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에 좋은 환경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야 당연 계속해야겠지만, 이건 아이를 더 많이 낳게 만들려는 방편이라기보다 사람으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바이기에 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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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있어야 나라가 나라다운 꼴을 갖추고 생존할 수 있다. 나라다운 존립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바로 그 사람의 부족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앞에 펼쳐진 사태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당장 우리나라의 생산, 그것도 밑바닥 생산을 가능케 하는 힘은 혁신이고 뭐고를 떠나서 결국 사람에게서 오는데 그 사람들이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아니라 먼 나라에서 나고 자라 여기에 온 이들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20203) 우리나라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있는 외국인은 126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난 4월 공적 마스크 배분과 관련한 논의 과정에서 정부는 46만 명가량의 미등록 외국인이 있으리라 추정한다고 고백한다. 이 숫자는 장기적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무비자 외국인을 추정하는 것일 뿐, 단기비자로 와서 일하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이들(주로 농장 단기 알바)은 이런 추정 속에도 잡히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범법행위인 무비자 체류자들이 도시 몇 개를 채우고도 남는 형편인데 도무지 우리는 어찌하여 이들의 존재를 없는 듯 눙치는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조차 추적에 추적을 거듭하며 누가 누구에게 옮겼는지를 하루 이틀 안에 파악해 내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여기에 우리의 위선이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그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그들이 없으면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인정하기 싫고,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일 뿐. 올 해 코로나 바이러스로 나라간 여행이 막히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수많은 업종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절박한 어려움은 농장의 일꾼을 찾는 어르신들이 겪고 있다. 철에 따라 밴으로 실어오던 외국인 처자들이 없으니 밭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공장이라면 기왕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기라도 할 터인데 농장 노동자는 철을 따라 주로 단기로 수급해 온 형편이라 코로나로 오가는 길이 막히니 당장 모든 게 막혀버린 것이다. 힘겨운 파고가 몰려오면 사회의 가장 약자들부터 이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언론매체는 밭농사 짓는 이들의 소리를 담지 않는다. 가끔 양념처럼 주된 이야기의 곁가지로 뿌리기도 하지만 진지한 호소에는 한참 못 미친다. 농촌에서 사는 게 뭐 그렇지다 아는 이야기는 오래된 전축의 맥 빠진 옛 노래처럼 호소력이 없다. 천문학적 돈을 번다는 어느 반도체 공장에 두어 시간 단전만 되어도 수 백 억 손해가 발생했네, 어쩌네 하며 온 매체가 한마디씩 거들지만, 눈을 뻔히 뜨고 밭이 썩어나가는 판은 마치 세상이란, 아니다 자연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듯 우리 사회의 눈길을 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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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KBS 뉴스7 화면 갈무리)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일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에 있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 자신의 필요에 앞서 대한민국에게 이들이 필요하다. 안타까운 건 그들을 일선에서 필요로 하는 이들도 사회의 약자. 소상공인, 농민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들에 비해 더 약자일 뿐. 그러니 사회는 자꾸 악덕 업주와 불쌍한 이주민의 싸움 정도로 이주민 문제를 축소요약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빛나는 성취의 그늘 속에서 소규모 공장주나, 농민이나, 이주민들의 어려움을 알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좀 잠자코 있어주기를 바란다. 이들을 우리 삶의 주제로 주제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우리에게 그들이란 일할 수 있을 때 일하되, 몇 년 뒤에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대전제 속 존재들이다. 곧 남의 자식이다. 내 자식 건사하기도 버거운 현실 속 남의 자식문제까지 주제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냐고 단단한 침묵이 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인즉슨, 우리는 이미 이들과 삶으로 얼기설기 얽혀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같은 흙을 밟으며, 기계를 돌리며, 땀을 흘리며 서로의 입에 뭔가를 넣어주며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야 한다. 그들의 존재 덕분에 이 나라가 굴러간다. 행정력으로야 지금 당장이라도 일주일만 바짝 밀어붙이며 온 나라의 미등록 노동자들을 모두 색출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걸 감당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밀려와 여기 사는 이들을 우리의 하나로 받아들이지 않겠노라 고집을 피우는 건, 결국 시간문제일 뿐 달리 도리가 없이 지는 싸움이다. 낯설어 불편하고 두렵지만 새 식구로 받아들이고 안아주는 게 서로에게 훨씬 이롭다는 건 자식을 성혼시켜 본 이라면 모두 잘 안다. 빨리 받아들일수록 부작용도 적고, 행복도 더 깊다. 우리와 함께 이미 사회를 이미 이룬 이들을 언제까지 뜨내기 취급하며 부려먹고 내버리기를 반복할 것인가. 와서 땀을 흘리라고 했다가 더 만만한 이들을 데려와야겠다면 가버리라고 윽박지르는 짓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여기서 울고 웃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언제까지 기계 부품처럼 소모할 것인가? 축사와 함께 떠내려가는 외국인 노동자 숙소, 저 허량한 컨테이너 박스를 바라보며 휩쓸려 떠내려가는 건 저 컨테이너 박스가 아니라 GDP 세계 9위가 되었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우리 자신의 가벼움이다. 다행히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려면 이제 사람을 잡아야 한다.

 

 

이근상 시몬 신부 (예수회)

이주노동자지원센터 이웃살이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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