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평화의 복음을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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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2020년에도 어김없이 여름은 가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오래 비가 올 수 있나 싶었던 여름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우기(雨期)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위기(危機) 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새로운 위기 가운데 살아가기’를 ‘뉴 노멀’(New normal)이라 이름 붙였다. 이것 또한 또 하나의 새로운 보통의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의 다짐인 셈이다. 이 뉴 노멀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는 어떤 소망의 이야기가 있는가?
장로교회 목사 아들로 자란 내게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성한아, 너도 천국 가려고 교회 다니냐?” 고등학교 방송반을 같이 하던 친구가 물었다. 한 달에 두 번 일요일, 학교에 나와서 방송통신고등학교 수업을 도와야 했다. 그러나 주일 아침 (대면)예배 참석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나의 깊은 신심 때문에 방송반 선배들과 동기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동기들은 내가 목사 아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예배 참석이 내게 중요한 신앙 행위라는 것도 이해해 주었다. 수학여행을 일요일 오전에 출발한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수학여행지인 경주까지 개인 출발을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날 그 질문은 단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난, 그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친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답으로 떠오르는 성서의 몇 구절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잘 요약해주는 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나는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이해했었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은 그냥 따로 떨어져서 있지 않고 요한복음서 안에 있다.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유다인 지도자와의 대화 가운데 3장 16절이 등장한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온다면 요한복음서를 지금 “집어 들고 읽어라.”)
이런 맥락 안에서 3장 16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흔히 생각해왔던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죄를 용서받고 멸망하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예수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는 계속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와 함께 읽어야 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다. 마태오 복음서에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겼던 유다인을 위해 그 말 대신, 그냥 하늘나라, 천국이 사용되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 ‘하늘나라’, ‘천국’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되는 삶을 뜻하는 ‘영원한 생명’은 모두 같은 의미로 보아야한다. 예수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느님 나라를 뺄 수 없다. 예수 탄생의 이야기로부터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이야기까지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가 더불어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하느님 나라의 특징, 본질은 무엇일까? 예수가 선포했다는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나라는, 그러면 다른 나라들, 세상의 지도자들, 왕들의 통치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서의 샬롬(Shalom)을 떠올리게 된다.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은 거듭 그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날을 기대하면서 ‘다가올 새 시대’를 호출한다. 예를 들어서 미카서 4장은 샬롬의 통치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시리라. 그리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3-4)
절대적 초월자인 신을 빼면 신학(Theology)과 가장 가깝다는 평화학(Peace Studies)에서는 평화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흔히 평화의 반대말로 전쟁이나 폭력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전쟁과 폭력이 멈춰야 한다.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전쟁과 갈등이 종식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구조적인 억압이나 폭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착취와 억압이 종식되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이 조화와 질서 가운데 있는 안녕(well-being)을 누리는 상태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고 정의한다. 물론 적극적 평화의 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소극적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면 평화학에서 말하는 적극적 평화의 상태는 구약 성서가 소개하는 샬롬의 모습과 가깝다고 할 것이다.
왜 나는 "성한아, 너도 천국 가려고 교회 다니냐?"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이른바 모태신앙의 10대 소년이었던 나에게도 “예수천국, 불신지옥” 여덟 글자로 요약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랑스러워할 ‘좋은 소식(복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방식의 이해와 진술에는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복음을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납작해져 버린 복음은 가장 선명하고 직설적인 진술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보이셨던 하느님 나라의 길을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부정한다. 그 납작한 복음의 또 다른 비극은 지금 우리가 맞이한 전 지구적 기후 위기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긴박한 여러 의제들에 답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2020년 전광훈이 대표하는 보수 개신교회의 부끄러움은 이 납작한 복음의 충실한 열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 더욱 담대히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자. 평화의 복음을 이야기하자!
“복음은 우리에게 한층 높은 차원에서 더욱 강렬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줍니다. “생명은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나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자는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정을 되찾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에도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되찾고, 이를 더욱 키우도록 하십니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고 낙담하며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살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Evangeli Gaudium #10)
김성한 (평화교육가)
김성한은 교회사, 평화학, 선교학을 공부했다. 한국기독학생회(IVF) 간사로 일했다.
지금은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 평화교육가로 일하고 있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코드셋이란 밴드에서 기타와 노래를 담당한다.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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