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성찰가이드]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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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성찰 가이드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맥락
2026년 제112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은 우리에게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바라보라고 초대합니다. 전쟁과 박해, 빈곤과 폭력, 기후 재난으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가운데 어린이와 청소년은 가장 취약한 자리에 놓입니다. 이들은 이동할지, 어디로 갈지, 누구와 살지를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만든 국경과 제도, 전쟁과 불평등의 결과를 온몸으로 견뎌야 합니다.
이주가 끝났다고 아이들의 고통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아이는 가족을 잃거나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고, 어떤 아이는 불안정한 체류 자격 때문에 교육과 의료의 문턱 앞에서 멈춥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동안 또래의 편견과 차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주 과정에서 겪은 폭력과 상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상처로 남고, 고독과 불안은 마음과 몸의 아픔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도 다양한 이주 배경을 지닌 아이들이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등록 이주 아동, 부모와 떨어져 살다가 뒤늦게 한국에 온 중도 입국 청소년, 전쟁과 박해를 피해 온 난민 가족의 자녀, 북한과 제3국을 거쳐 온 청소년이 우리 학교와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출생지와 체류 자격, 가족 상황, 언어와 경제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하나의 이름으로 묶기보다 각자의 삶을 가까이에서 듣는 일이 먼저입니다.
이주 배경은 아이를 설명하는 한 부분이지 아이의 전부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자신의 경험과 언어, 문화와 재능, 꿈을 지닌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낯선 이방인이나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아이가 안전하게 배우고 아플 때 치료받으며 가족과 함께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는 어떤 문을 열어야 합니까?
성경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마태 18,5
성찰
예수님은 어린이 한 사람을 제자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 권리와 지위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작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린이를 당신을 만나는 자리로 가리키십니다. ‘하나’라는 말은 대상을 줄이는 표현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을 통계로 바라보는 데 익숙한 우리의 시선을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 두려움과 꿈으로 되돌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주민과 난민의 현실을 큰 숫자와 먼 나라의 사건으로 접하곤 합니다. 그러나 숫자는 고통의 규모를 보여 줄 수 있어도 한 아이가 잃어버린 친구와 집, 낯선 교실에서 삼킨 말, 가족을 기다리며 보낸 밤을 모두 들려주지는 못합니다.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말을 거는 데서 시작합니다.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꿈꾸는지 듣는 일입니다. 듣지 않은 채 베푸는 도움은 아이를 다시 침묵시키기도 합니다.
교황 담화는 모든 이주 아동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만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이는 약한 이를 불쌍히 여기라는 권고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국적과 체류 자격, 언어 능력에 따라 흐려지지 않습니다.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와 병원에서 밀려나거나, 부모의 법적 지위 때문에 아이의 미래까지 불안정해지는 현실은 한 인간의 존엄을 행정적 자격 아래 두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환대는 먼저 아이를 온전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따라서 환대는 따뜻한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안전, 교육과 의료,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동 최선의 이익’은 이주 관리의 편의보다 앞서야 합니다. 가족을 갈라놓는 조치가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살피고, 체류 자격과 관계없이 기본권을 누릴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교회 역시 이 일을 전문 기관에만 맡겨 둘 수 없습니다. 본당과 학교, 수도 공동체와 교회 기관 모두가 아이들이 배제되지 않는 환경을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주 아동을 고통의 모습으로만 바라보아서도 안 됩니다.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힘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함께 기억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도움을 받는 객체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학교와 교회,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기억, 문화와 감각은 우리 공동체를 불편하게 만드는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더 넓은 세계를 배우게 하는 선물일 수 있습니다. 아이의 목소리를 대신 말하기보다 아이가 직접 말하고 결정할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성가정도 폭력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떠나야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아기 예수님을 지킨 마리아와 요셉의 여정은 오늘 피난길에 오른 가족들의 두려움과 이어집니다. 우리가 이주민과 난민 어린이를 맞아들이는 일은 과거의 성가정을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 곁에 피신해 온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주님은 안전하고 익숙한 모습으로만 오시지 않습니다. 서툰 말과 불안한 신분, 낯선 이름을 지닌 한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 공동체의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은 우리에게 거창한 답보다 구체적인 한 걸음을 요청합니다. 우리 지역에 어떤 이주 배경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그 아이들과 가족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을 묻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본당의 교리와 전례, 청소년 모임과 돌봄 활동에 누구도 언어와 문화 때문에 배제되지 않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학교와 지역사회에 교육과 의료, 체류와 가족 결합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한 아이를 받아들이는 작은 선택이 공동체 전체를 복음에 더 가까운 자리로 이끕니다.
질문
1. 이주민과 난민 어린이를 떠올릴 때 내 안에 가장 먼저 생기는 감정과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 안에는 어떤 편견이 깃들어 있지는 않나요?
2. 나는 이주 배경을 지닌 아이를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와 재능과 꿈을 지닌 동등한 한 사람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3. 우리 본당과 학교, 직장과 지역사회가 한 아이의 교육권과 의료권,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은 무엇입니까?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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