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문] 형제애: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영감과 쇄신의 원천 (브루노 마리 뒤페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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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형제애: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영감과 쇄신의 원천’
-'모든 형제들'에 관한 브루노 마리 뒤페 몬시뇰의 성찰-
(교황청 온전한 인간 발전 촉진을 위한 부서 사무총장)
"Fraternity: A Source Of Inspiration And Of Renewal For Democracy And For Peace"
The reflections of the Mons. Bruno Marie Duffe, Secretary of Dicastery for Promoting Integral Human Development
https://www.humandevelopment.va/en/fratelli-tutti/riflessioni.html
부상당해 길가에 방치된 이를 돌보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인물을 통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형제애에 대한 그의 성찰이 형제적 관계와 정치적 삶에 대한 사유로 나아가는 본질적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형제들’의 2부(특히 5장과 6장)는 정치에 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형제애가 사람들 사이 관계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는 만남과 대화, 책임을 나누는 장소입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정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공동선과 정의를 위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
민주주의는 일종의 기획이자 정치적인 관례로서 ‘개방적인’ 세상을 꿈꾸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3장 참조) 따라서 민주주의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만을 중시하고 타자를 부유함과 약함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닫힌’ 세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리적이 아닌 실존적 사랑의 보편적 개방성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날마다 나의 반경을 넓혀 가서, 나와 가까이 있지만 나의 관심권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들에게 도달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음에도 내가 속한 사회에서 버려졌거나 무시당하는 모든 고통받는 형제자매는 실존적 외국인입니다.” (97항)
민주주적인 공간은 ‘열린 장소’입니다. 이 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말들이 그 어떤 두려움 없이 오고가며 인간의 권리와 상호의무가 존중되고 실현됩니다.
‘사회적 우애’는 형제애, 돌봄, 자비, 올바른 관계에 대한 탐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바, 결코 연약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특히 가장 약한 이)를 업신여기는 것을 거부하고 ‘공동의 책임’의 건설을 향해 개방해나가는 강력한 도덕적 자세입니다.
“사회적 우애를 실천하는 민족과 국가를 기초로 형제애를 실현하는 세계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참으로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더 좋은 정치가 필요합니다.” (154항)
우정이라는 말에 걸맞은 이러한 상호환대는 우리를 타인의 말과 우리가 한 약속, 용서의 필요성에 더욱 예민하게 해주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타인(개인이나 공동체)을 과격한 이미지나 멋대로의 이미지로 봉인해버리지 않게 합니다. 환대는 상호적인 것으로, 우리의 국제적인 협력 프로젝트나 전쟁과 폭력에 의해서 찢겨진 이주민과 난민과의 연대에 등불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권력지향적인 목적에서 대중들의 희망을 이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앗아버리는 대중영합주의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성찰이 분파주의나 배타적인 공동체주의의 덫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사회적 다원성의 풍요로움을 증폭하고 다원주의의 실현가능성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럴 때 다양한 접근법과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공동선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행복하게 실현하는 것으로, 평화의 지평 속에서 그리고 평화라는 조건 하에서 조망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우리의 기억, 우리의 희망을 보존하는 인권과 유대관계를 돌보는 것입니다.
“한 민중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유대에서 나온 공동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계획을 향하여 나아가는… 더디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58항)
형제애와 정치적 삶과 관련하여 시간과 ‘더딘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세계의 현 상황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도덕적인 여정 안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람들과 제도의 근원적인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타인을 배제해서는 결코 진화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평화는 ‘좋은 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2019년 1월 1일 평화의 날 담화문) 뿐만 아니라 평화는 애덕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의 표현하는 것입니다.
“참된 애덕은 이 모든 요소(사생활, 법률, 최소한의 복지, 상업교류, 사회 정의, 정치적 시민권)를 담아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쏟습니다. 참된 애덕은 분명 개인적 만남 안에서 표현되지만, 조직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사회 제도들이 창출하는 다양한 자원을 통하여 멀리 있거나 무시당한 형제자매에게도 닿을 수 있습니다.” (165항)
그렇기에 애덕은 단순한 도움과 원조의 관계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애덕은 곧 정의이며, 도움이며, 활동 중의 사랑입니다. 애덕은 쉽게 말하면 지역 공동체, 국가 공동체, 국제 및 세계 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계와 마을에 속한 존재입니다. 오늘날 이 두 가지 차원(지구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의 상호배려와 평화로운 미래가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만, 모든 이를 위한 정의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사회적 여정의 시작에 다른 이들과 함께 참여할 때에 ‘가장 드넓은 애덕의 분야, 이른바 정치적 애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180항)
번역: 김민 사도요한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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