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연대 강좌] 한일관계, 그 역사와 평화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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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예수회 인권과 연대 강좌
‘한일관계, 그 역사와 평화의 가능성’ 리뷰
10월 18일 예수회센터에서는 2019 예수회 인권과 연대 마지막 강좌 성공회대 권혁태 교수님의 ‘한일관계, 그 역사와 평화의 가능성’ 강의가 열렸습니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는 3.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식민주의를 넘어 평화와 인권의 역사로’를 주제로 5회의 인권과 연대 강좌를 준비했습니다. 2019년은 역사적 사건들을 기리는 해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며 식민주의의 잔재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사무치게 느낀 한해기도 했습니다. 인권과 연대 강좌를 마무리하며 권혁태 교수님은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며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근본적의 해결책의 모색하고, 그 가능성을 짚었습니다.
권혁태 교수님은 한일 갈등의 핵심은 ‘역사 문제’보다는 ‘안보 문제’라고 분석합니다. 한일 양국은 오랜 세월 안보를 위한 군사협력을 위해 위안부 등 역사문제를 봉합하고 군사 동맹 강화에 집중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한일 갈등은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주제에서 다양한 주체에 의해 제기되며 갈등이 다변화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1990년대 냉전 해체와 한국의 민주화 이후 오랜 군부독재 하에서 침묵해야했던 역사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한일관계의 비대칭성의 문제가 대두했다고 분석합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우파 정권이 권력을 잡으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존중하기보다 정부 주도의 군사정보협정이 우선됐던 사례들을 그 예로 제시했습니다.
해방과 독립 이후 한일관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65년 한일협정 체제’ 또한 한일갈등이 결국은 본질적으로는 안보 문제임을 보여주는 예로 제시되었습니다. 권 교수님은 65년 체제는 “안보를 위해 역사를 죽인 체제”라고 설명합니다. 65년 체제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삼각 동맹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 후 전후 일본과 한국의 군사정권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역사문제나 영토문제를 억압하며 봉합하는 전략을 취하게 됩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위안부 등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과를 담은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 등이 발표됩니다. 그러나 권 교수님은 95년 체제 또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법적 책임을 언급하지 않으며 도덕적 사과라는 형태로 문제를 봉합했다는 점에서 65년 체제의 연명책에 그쳤다고 지적합니다.
더불어 2011년에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후쿠시마 사고는 기존의 한일 관계가 겪어왔던 갈등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종류의 갈등입니다. 체르노빌의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후쿠시마 사고가 주변국과 향후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안전의 공동성, 보편적 생존권에 근거한 문제제기 조차 기존의 한일 갈등의 연장선에서 갈등을 증폭하며 공동의 문제 해결은 실마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권혁태 교수님은 북한의 선택에 따라 한일관계도 그 모습을 달리할 것이라 예측합니다.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대립, 혹은 적극적인 대북 투자가 일본의 선택지가 될 것입니다. 냉전의 최후에 동북아 각국은 각자 다른 양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일본은 우경화, 한국은 민주화, 중국은 패권강화 양상이 나타났으며 핵우산이 되어주던 중국과 소련을 잃은 북한은 자국의 체제 보장을 위해 핵무장에 나서게 됩니다.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동북아 평화.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먼저 권 교수님은 보편적 인식과 달리 아시아의 역사적·문화적 공통성은 유럽과는 달리 무척 희박한 편이라고 짚습니다. 우선은 언어부터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의 젊은이들이 이웃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등 공동성 확보를 위한 장기적 노력도 부재합니다. 동북아 국경을 뛰어넘은 시민들의 국제적·문화적 연대는 확대되고 있지만 민간교류는 근본적으로 국가 간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지는 못합니다.
권혁태 교수님은 ‘평화의 방법으로서 과거지향성’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미래를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흔히 하지만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과거의 축적물에서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저항과 피해의 주체를 확대하며 역사의 피해자와 저항자를 새롭게 구성하는 평화의 방법으로서 과거지향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독일의 경우 나치 시대의 피해자를 유태인에 한정하지 않고 1980년대 이후 동성애, 장애인, 탈영병 등으로 저항과 피해의 주체를 확대해왔습니다. 평화와 인권의 관점에서 고통받고 저항했던 모든 약자들을 저항의 주체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여전히 피해와 저항의 주체를 스스로 좁게 설정하며 저항 주체를 확대하는 것에 반발하는 흐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군국주의를 넘어 국가주의에 의해 고통받고 대항했던 모든 소수자들로 저항의 주체를 확대할 때 우리는 한뼘 더 식민주의 넘어 평화와 인권의 새로운 역사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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