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회를 이루는 ‘히든 피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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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는 1960년대 초반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했던 흑인 여성 수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NASA의 우주 프로그램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숨겨진 존재’라는 제목이 말하듯, 영광의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힌 사람들이다.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 도로시, 메리를 숨겨진 존재로 남게 하는 것은 뿌리 깊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이다. 뛰어난 능력과 열정에도 흑인이며 또한 여성인 이들은 자신의 공헌을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중요한 역할에서는 배제되는 현실을 경험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며, 주목받는 무대의 뒤편에서 실제로 묵묵히 일해 온 숨은 존재들을 드러낸다. 또한 영화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메리 잭슨은 엔지니어가 되고자 했지만, NASA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흑인은 입학할 수 없는 백인 학교에서의 교육을 이수해야만 한다. 메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법원을 찾아간 메리는 흑인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하고, 결국 부당한 제도를 바꾼다. 영화 속 메리의 이야기는 1958년 NASA의 첫 번째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 실존 인물 메리 잭슨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캐서린 존슨은 여성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중요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주 비행의 궤도를 결정하는 회의 참석을 막는 상사에게 “There is no protocol for a man circling the Earth either, sir”이라는 말을 던진다. 영화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이 대사는 존재하지 않는 규정을 근거로 실제로는 관습에 의해 계속된 차별과 배제에 맞서는 캐서린의 용기를 보여준다. 더불어 인류가 이전에는 시도해 본 적 없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에도 오래된 관습에 매달려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존재인 캐서린을 번번이 밀어내는 어리석음 역시 드러내 보인다.
지난 7월 9일 교황청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는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을 발표했다. 오는 10월 2일부터 열리는 정기총회 기간 총회 참가자들이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안내할 이번 문헌의 주요 원칙은 소수자와 여성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교회의 모습을 제시한다. 특히 교회 내 여성의 역할 확대는 이번 시노드의 중요한 의제로, 의안집은 여성 역시 “성령으로부터 같은 은사를 받았고 온전한 평등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적 여정으로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이루는데 동등한 지체로서 여성의 참여는 시노달리타스 실현의 핵심적 요소다. 숨겨진 존재로 머물러야 했지만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이들이 없었더라면 NASA의 눈부신 성취가 가능하지 않았을 영화 속 이야기와 2024년 여름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겹쳐 보이는 이유다. 마침내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된 캐서린이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주 비행의 궤도를 예측할 수 있었듯,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 여성의 참여는 단지 맡겨진 계산을 수행하는 손발로서가 아니라 그 방향과 비전을 식별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 사제의 일과 평신도의 일은 교회 안에서 뚜렷하게 나뉘며 이는 자주 교차하며 더 큰 경계를 낳는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 여성의 평등한 참여를 실현하는 것은 제삼천년기 교회가 교회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반드시 걸어야 할 여정이다. 의안집은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책임과 투명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여성을 비롯해 그동안 숨겨져 온 존재들의 참여를 통해 교회는 더 투명하고 책임감 있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열린 의사소통과 책임과 권한의 공정한 분배는 모든 건강한 공동체의 기반이며, 믿음의 공동체로서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실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배제되었던 캐서린이 마침내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주비행사 존 글렌의 궤도 비행이 너무나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 속에서도 캐서린 존슨은 글렌의 비행 궤적을 계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변화는 쉽지 않다. 고정관념과 관행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과 다르게 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절실한 상황을 마주할 때, 닫힌 문은 열릴 수 있으며 교회는 이제 문을 열어야 할 때다.
교회의 히든 피겨스로서 그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들, 소수자들, 평신도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동등한 기회의 문을 여는 것은 단순히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노력만이 아니다. 이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교회를 더 풍성하게 하는 길이다. 영화에서 캐서린의 참여가 우주 비행의 성공을 가져왔듯, 교회 내 모든 구성원의 평등한 참여는 교회의 사명을 더욱 온전하게 수행하는 열린 길이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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