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자인가?

김민SJ 121.♡.235.108
2022.02.22 15:46 3,4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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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말같은 것에 신경을 끊고 사는 편입니다. 그런 것에 신경써봐야 스트레스나 받으니 아예 신경끊고 사는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좋으니 말입니다. 이는 비단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2021년 미국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장 낸시 펠로시가 바티칸을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고 악수한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을 때, 공화당 클라우디아 테니 하원의원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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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공산주의자

 

이런 정도야 정치인들이 자주 연출하는 질 나쁜 코미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좀 심각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컨대 저명한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2016년 독일 일간지 Kölner Stadt-Anzeiger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해방신학자] 중의 한 명이다.”

 

이 인터뷰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해방신학을 교회의 공동 자산으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이를 확장시켰다. 오늘날 가난한 이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또한 약탈당하고 훼손당한 우리 지구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의 울음에 귀기울이는 것은 동물과 나무, 모든 고문받고 있는 피조물의 울음에 귀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난한 이와 피조물의 울음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라우다토 시의 새로운 원리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보프의 이러한 평가는 선후관계 오인의 여지가 있습니다. 해방신학을 확장시킨 것은 보프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프의 해방신학은 1970년대 그가 보였던 격렬한 어조와 치열한 대립구조-가난한 이들 대 권력을 가진 이들-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적인 언어가 사라지고 보다 부드러워졌으며, 특히 생태적인 지평이 뚜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심사는 해방신학 보다는 인간중심의 인간학 혹은 환원적 인간학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부분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 복음의 기쁨입니다)에서 시작하여 지구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작년 다시 인간의 관계로 돌아와 환원적 인간학의 대안으로 형제애에 기반한 참된 인간학으로(“모든 형제들”)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환원적 인간학 reductional anthropology은 프란치스코 특유의 표현으로, 인간을 어떤 요소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자본주의에서 인간을 몸값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 환원적 인간학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든 문헌들을 연결하는 씨줄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질문을 정리해봅시다.

과연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에 속하는가, 아니면 최소한 우호적이라도 한가?

 

시간이 아까운 사람들을 위해 미리 결론을 이야기하면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1. 개인적인 성향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향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사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을 무척이나 꺼려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실제로 2013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모임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사회학적 환원(Sociological reductionism)은 메시지를 이데올로기로 만드는데 가장 잘 활용되는 수단입니다. 어떤 시대이든 이러한 방식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는 사회과학에서 비롯한 해석학에 기반을 둔 해석적 설명입니다. 이는 시장 자유주의에서부터 마르크시즘적 범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방면에 적용됩니다.”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speeches/2013/july/documents/papa-francesco_20130728_gmg-celam-rio.html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른바 베르골리오 4원칙의 하나로 분명하게 이렇게 표현됩니다.

 

현실이 관념보다 더 중요하다.” (주교회의 번역판에서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 “관념이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되면” “말만 내세우는 세계, 이미지나 궤변의 세계에서 살아가게될 터인데,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은 헛된 이상론과 유명론을 낳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관념이 현실과 대화를 나누기보다 관념의 세계 속에만 갇히게 될 때에는 헛된 말잔치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향으로 인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반이데올리적, 반이념적 성향을 보이며 그렇기에 해방신학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2. Teología del pueblo, 아르헨티나 민중신학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더 결이 맞았던 신학은 민중신학 보다는 아르헨티나 민중신학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이주민의 후손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기억을 물려받은 아르헨티나 인으로서 프란치스코는 정체성의 문제에 무척이나 예민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르헨티나 민중신학에서 강조하는 민중 el pueblo의 개념, 즉 역사와 문화의 주체이자 오랜 역사를 통해서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방언을 형성해낸 민중은 프란치스코에게 굉장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에게는 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주교 시절 민중신학의 주창자 중의 한 명인 라파엘 텔로 Raphael Tello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출판된 저서(Enrique Ciro Bianchi, Theology of the People: An Introduction to the Work of Rafael Tello)에서 실린 인사말에서 오늘날 교회는 민중신학이 유효할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복음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고 극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아르헨티나 민중신학이 한국의 민중신학과는 달리 해방신학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무척이나 미심쩍어 했던 이유는 해방신학에서 채택한 사회분석방법론이 마르크시즘에 기반한 탓이 컸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교회는 유물론에 대해서 극도로 혐오했고 유물론의 대표주자가 바로 마르크시즘이었으니 이에 대한 교회의 혐오감과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프란치스코가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재직하던 시기 전체 예수회를 통솔하던 페드로 아루페 총장이 마르크시즘에서 유물론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사회분석방법론을 구분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바티칸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페드로 아루페의 경우 마르크시즘의 사회분석방법론에 대해서 그 효용성을 매우 인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측근 중의 한 명인 장 이브 칼베스 Jean-Yves Calvez가 저명한 마르크스 전문가였을 정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8년 프랑스 사회학자 도미니크 월튼과의 인터뷰에서 페드로 아루페를 인용하면서 마르크시즘과 이의 영향을 받은 해방신학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80년대 페드로 아루페 신부님은 마르크시즘 현실 분석을 비판하는 편지를 쓰면서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매우 훌륭한 편지입니다. 바로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민중신학이라고 불리는-저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취한 것이기도 합니다.” (Dominique Wolton, The Path to Change: Thoughts on Politics and Society)

 

하지만 페드로 아루페는 분명 마르크시즘 현실분석의 유용성을 인정했습니다.

 

우선 저에게는 사회분석에 있어서 다소 마르크시즘적 분석에서 기인한 일련의 방법론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이는 오직 마르크시즘에만 존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컨대 경제적인 요인들, 자산의 구조,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강조... 전체 계급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착취에 대한 예민한 감각, ... 계급투쟁의 역할에 대한 의식, ...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Marxist Analysis by Christians, 1980128, No.4-5.)

 

아무튼 분명한 것은 프란치스코는 페드로 아루페의 편지를 오독하면서까지 마르크시즘을 싫어했나 봅니다. 반면 프란치스코에게 민중신학은 마르크시즘과 같은 유물론에 오염되지 않으면서 식민지의 경험을 다시 살펴보고 식민지 이전 원주민들의 문화적인 풍요로움, 그 문화적 풍요로움을 간직한 지금 민중들의 저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훌륭한 이론적인 틀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민한 신학자 보프에게 자신과 같은 진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다지 영민하지 않은 미국의 하원의원에게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설명한 환원론적 인간론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자유주의로, 신자유주의에서 주창한 국경없는 자본의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치스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실제로 많은 문헌들과 연설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 즉 이데올로기 대결의 냉전체제가 해체되어 마르크시즘의 실질적인 위협이 사라진 오늘날 프란치스코의 반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아마도 좌파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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