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루틸리오 그란데의 자리

김민SJ 121.♡.235.108
2022.01.18 15:09 2,97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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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절차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질문은 순교의 의미, 즉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um fidei)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가 신앙과 믿는 바를 실천하다가 죽는 것을 의미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교황은 답변은 “저도 역시 이 증오(in odium fidei)가 신앙을 고백한 것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이웃에 대해 예수님이 명하신 것을 행한 것에서 비롯한 것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신학자들의 임무이고 그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스카 로메로와 더불어 루틸리오 그란데의 이름도 언급하였다.

 

신앙과 신앙에서 비롯한 행위를 구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속내를 짐작하기는 쉬워 보인다. 성경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구분되니까. 특히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들 곁을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메로 주교와 그란데 신부에게서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실천하다가 순교한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 앞에는 오스카 로메로 주교의 피가 묻은 옷조각과 함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교리서 노트가 들어 있는 액자가 있다.

 

심지어 교황은 2019년 1월 파나마에서 30명의 예수회원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로메로를 더 잘 알게 되기 전에 이미 루틸리오의 숭배자였습니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그의 삶은 나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의 죽음이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 루틸리오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로메로를 ‘회심’시켰지요.”

 

엘살바도르를 제외하고는 로메로 주교에 비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루틸리오 그란데 그라시아 신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무슨 일을 했고, 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그리고 한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그의 순교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이 질문들에 답을 찾아보자.

 

 

농민으로 태어나 농민 곁을 지키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 중에서 특이한 단어가 있다. ‘캄페시노(Campesino)’라는 단어인데, 농부로 번역되긴 하지만 진짜 의미는 우리말로 소작농에 가깝다. 스페인 지배에 있었던 필리핀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농민은 자신들의 땅을 경작하기 보다는 대지주의 농노나 소작농인 경우가 많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엔코미엔다스 혹은 일종의 중세적인 봉건체제로 편성하여 원주민들을 스페인 출신이나 혼혈의 대지주가 소유한 토지에 종속시켰다.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이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농민들은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대지주들에게 사실상 지배되고 있었고 이는 지금도 여전하다. 엘살바도르 역시 이러한 대지주들에 의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휘둘렸고 농민의 삶은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라스 카토르쎄 파밀리아스(las catorce familias, 14가문)라고 불리는 대지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며 비록 가문의 수는 14개에서 8개로 줄어들었지만 경제계의 큰 손으로 남아있다. 당연히 농민들은 그 어떤 발전과 개발의 수혜에서 제외되었다.

 

루틸리오 그란데 가르시아는 1928년 7월 5일 엘파이스날에서 매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큰 형과 할머니의 손에서 농부로 자랐다. 비참한 농부의 삶은 그가 나중에 사제가 된 후에도 그의 영혼과 활동에 큰 흔적을 남겼다.

 

우연한 계기로 그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세 되던 해 교구의 주교가 엘파이스날에 사목방문을 왔다가 루틸리오를 눈여겨보고 수도 산살바도르의 소신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소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17세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한다. 당시 중앙아메리카에는 예수회 수련원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 나중에는 스페인으로 옮겨다니며 양성을 받았다. 1959년 서품을 받은 루틸리오는 그의 장래의 사도직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벨기에의 루멘 비타에(Lumen Vitae) 연구소에서 사목방법론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루멘 비타에 연구소는 예수회 기관으로, 예수회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들이 보다 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 1935년 벨기에에 설립되었다.(‘루멘 비타에’라는 이름으로 1946년 개명된다.) 이 기관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많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불어넣은 쇄신의 바람과 함께 해방신학이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유럽의 신학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이 만난 것이다. 여기에서 루틸리오는 특히 평신도와 함께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사목을 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사목방법론을 접하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65년 엘살바도르로 돌아온 루틸리오는 산살바도르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사회과학 방법론을 신학생들에게 강조하였는데,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근본원인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루틸리오는 신학생들이 장차 사제로 섬겨야할 신자들, 특히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도외시한 책상물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신자 공동체-정확히는 농촌과 도시빈민지역의 기초공동체-에 들어가서 사는 실습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신학생들이 신자들이 매일 매일 경험하는 일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전통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교회 리더십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그는 1972년 에콰도르 키토에 위치한 라틴아메리카 사목연구소(IPLA, Instituto Pastoral Latinoamericano)로 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이 체험이 루틸리오에게 제2의 전환점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사목연구소에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이 공의회의 정신을 라틴 아메리카 맥락 속에서 이해한 1968년 메데인 문서에 표현된 이상대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목방법론에 관하여 깊이 천착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엘살바도르의 현실에 이러한 방법론을 어떻게 적용하고 그럼으로써 가장 취약한 이들인 농민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1973년 엘살바도르에 돌아온 그는 농민들 속으로 들어간다.

 

 

정의를 위한 삶을 살다.

 

루틸리오는 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우는 자선활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이 왜 굶주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사회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스스로 알도록 하는 것, 이것이 루틸리오에게 정의를 위한 활동이었고, 그가 벨기에와 에콰도르에서 배웠던 것이었다. 정의를 위한 활동, 정의에의 투신은 자선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자선은 홀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의는 함께 할 동료가 필요했다. 결국 기초공동체가 다시 중요하게 되었다. 루틸리오는 공동체가 더욱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 충분히 자질이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특별한 양성을 받도록 하였다. 루틸리오가 믿었던 것은 이렇게 양성된 이들이 공동체의 다른 이들을 또다시 양성할 것이고, 그렇게 모아진 힘이 법을 바꾸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때 지금과 같은 고통과 가난의 구조적인 원인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회분석을 강조하다.

 

루틸리오는 앞서 신학교의 교수시절에도 그랬지만 사회과학 방법론을 통한 사회분석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모든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개인의 악덕으로만 탓할 수 없는, 보이지 않아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악이 더 위험하고 근본적이다. 이러한 구조적 악의 결과만을 바라보며 이 결과를 되돌리려고 하면 마치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이 불의함의 근본원인을 알아낸다면, 마치 구마사제가 악령의 이름을 불러서 내쫓듯이 사회적 불의도 변화시킬 수 있다.

 

엘살바도르의 농민들-사실 소작농들-이 자신의 가난과 굶주림의 원인을 자신의 나태함에서 찾는다면 그건 번지수가 잘못된 것이다. 이들의 가난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막대한 지대를 납부해야 하는 역사적 사회적 불의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식민귀족들의 후예들이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의 형태를 한 과두체제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루틸리오는 이 모든 것을 농민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원했고 그런 깨달음을 위해 사회분석을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성직주의를 벗어나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누군가-특히 성직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필요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에 뿌리박혀 있는 성직주의가 문제였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전통적으로 정부와 교회가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대가문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고, 교회는 성직자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특히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의 문제, 곤란한 문제를 들고 성당에 가서 사제들과 상의하였다. 그럴수록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었고 심지어 자신의 운명조차 자신이 개척하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루틸리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동체에서 모든 문제를 나누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초대하였다. 루틸리오는 단체성(collegiality)의 개념을 넓게 확대하였다. 원래 단체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된, 교황과 주교들이 친교와 일치, 협력을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루틸리오에게 단체성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구 단위의 공동체에서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공동체를 통해서 모두가 함께 마음을 일치하고 성장해나가며 정의를 향해 걸어가기를 원했다.

 

 

농민들 곁에서 죽다.

 

루틸리오의 활동은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특히 정의롭지 않은 사회구조에 대한 계속되는 비판은 그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루틸리오에게 정의를 위한 투신은 자신의 신앙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계속해서 농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농민들과 함께 하라고 말씀하신다고 느꼈다. 그것이 신앙의 길이었으니까. 1977년 3월 12일 루틸리오 그란데는 그의 평신도 동료 마누엘 솔로자노와 넬슨 루틸리오 레무스와 함께 고향이자 일터인 농민들의 마을 엘파이스날에서 보안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로메로 주교는 그의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당일 엘파이스날로 달려왔다. 나중에 산살바도르에서 봉헌된 추모미사에서 로메로 주교는 루틸리오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신부님의 죽음의 참된 이유는 교구에 있던 사람들의 의식을 높이려던 그의 예언자적이며 사목적인 노력 때문입니다. ...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의 노력은 확실히 모든 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이는 많은 이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을 무력화시켜려고 합니다.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님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한국에서 루틸리오의 자리를 찾다.

 

루틸리오는 예수님이 엘살바도르에 오시면 곁을 지켰음에 틀림없는 이들 곁에 머물렀고, 그 이유로 죽었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자리는 농민들이었다. 사회의 모순의 가장 큰 희생자이자 가장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 그리고 루틸리오가 정의의 이름으로 고발했던 것은 식민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왜곡된 경제체제이며 이 경제체제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들이다.

 

각 나라에는 각각의 루틸리오의 자리가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자리들이 있다. 그 모든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인정이 거부된 난민신청자들, 이제는 꿈조차 꾸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청년들, 더 이상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멈춰버린 노숙인들. 어쩌면 자비와 연민이라는 단어조차 교황이라는 거대한 권위의 이름으로 발언될 때에야 기억해낸 우리 신앙인들일 수도 있겠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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