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이제 교회는 꿈을 꾸는 것에서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MarcusMescher 121.♡.235.108
2021.11.05 14:46 3,3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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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제들의 반포 후 1,

 이제 교회는 꿈을 꾸는 것에서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북미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작년 10월 반포된 모든 형제들은 미국 대선 전후 펼쳐진 드라마에 의해서 빛을 잃은 감이 없지 않다. ‘환원주의적인 인간학 전망으로 인한 부서진 꿈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염려는 교황이 읽은 시대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이 환원주의적 인간학 전망은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인간을 착취하며 분열시키는 것으로, 점점 비등하는 긴장과 정치적 당파주의에 편승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회칙은 양극화와 당파주의가 우리나라[미국]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오염시키고 문화전쟁이 우리-()-그들이라는 대립적 사고를 조장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일부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여기에서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모든 형제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범위한 불신과 분열에 맞서며 동시에 우리는 유례없이 더욱 고독하다는 사실에 비통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차별과 배제,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청하고 있다. 교황은 많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여성이 얼마나 취약하고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는지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하고 있지만, 교회가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떻게 배제와 불평등을 조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정 성()에 편중된 용어인 형제애나 남성독점적인 원천과 예에 의존함에 따라 회칙에서 강조하는, “다름을 환대하는 능력을 통하여 새로운 통합에 지속적으로 열려 있는”(160) “미래가 있는 민중과의 연대라는 개념의 신뢰성이 훼손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사회적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인정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에도 교회가 이러한 영적인 문제들을 야기하는 종교적 윤리적 양성에 대해서 과연 적절하게 접근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코로나로 인하여 야기된 죽음과 혼란은 모든 형제들의 작성과 수용 모두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쳤다. 전 세계 사람들은 지난 19개월 동안 우리가 감내해야했던 희생에 대하여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있다.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결과 이상으로 또다른 실질적인 문제가 있다. 교구생활에 참여하는 가톨릭의 숫자가 급감하고 있는 것이다.

 

상당수의 신자들이 온라인 전례나 봉성체에 충실한 것은 사실이나 상당 숫자의 신자들은 공동체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온라인 미사가 전례의 거행에 대해서 온전히 의식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에는 한없이 못미친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 감영의 위험으로 인하여 교회에 가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또 교회에서 자신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많은 경우 여성들이나 성소수자들, 흑인과 라틴계, 이혼이나 재혼한 이들, 과부나 그밖에 교회가 별로 환대하지도 않고 사목적 돌봄의 우선순위에 밀려난 이들이 해당한다.

 

수십년 동안 북미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본당을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라기 보다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소비사회와 결부되어 신자들이 본당 사목자들을 서비스 제공자, 그리고 자신들을 서비스 수급자로 보도록 만들었다.

 

평신도들이 본당의 성가나 강론, 교육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다 만족스러운 구매경험을 할 때까지 성당 쇼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치 식당이나 쇼핑몰을 갈 때 하는 것처럼 본당의 온라인 평가를 참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명에 의해서 묶여진 공동체가 아니라 단지 가야하는 어떤 곳으로 보는 관점을 강화한다. 코로나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고 자신을 더 이상 교회라고 보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많은 이유가 있다. 일부는 여성의 주변부화, 성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대우, 백인 주도의 공동체 문화, 포용과 자비와 같은 예수님의 치유와 가르침에 반하는 판단주의, 위선과 부패 때문이다.

 

또 일부는 낙태와 같은 일부 이슈에 대해서 주교들이 가지고 있는 속좁은 식견이나 사회에 뿌리를 내린 인종주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비민주적 입법, 화석연료에 의해 가속화되는 기후 위기 등과 일부 사회이슈에 대해서 주교들이 보이는 느긋한 행보로 인한 분노와 피로감 때문이기도 하다.

 

또 상당수는 사제 성추행과 이에 대한 은폐에 따른 윤리적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2년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들의 1/3 미만이 사제들이 정직하고 윤리적이라고 믿는다. 사제 성추행의 생존자들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수치스럽게 만들고 침묵하게 만들었던 교회의 관행이 교회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고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들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냈다.

 

십만명 이상의 희생자들을 성추행한 수천명의 사제들에 관한 진실이 드러난 후에도 교회는 진실을 말하고 참회하며 회복적 정의를 행하는데 미미한 발걸음을 보이고 있다.

 

규정에 따라 성찬례에서 구성원들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교회는 영적 성적 추행을 행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투명성과 신뢰, 예방행위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놓는 교회는 해로운 문화적 인간론에 대해서 비난할 그 어떤 윤리적 권한을 갖기가 어렵다.

 

교회는 안전과 신뢰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에 의해서 야기된 고통과 분노, 배신과 슬픔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연대를 향한 발걸음도 가능하지 않다. 교회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가 없다면, 권력을 일부에게만 허용하는 비대칭성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위계와 성직주의를 강화하는 구조를 변화하지 않는다면, 연대는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8년전 교황으로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교회가 요새보다는 야전병원다워야 한다는 교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바 있다. 이 비전은 우리에게 상처입은 사람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하는데 반해서 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에는 적합하지 않다.

 

야전병원은 긴급한 돌봄을 제공하지만 상처를 예방하거나 문제의 원인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형제들처럼 이 이미지는 세상에 문제가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교회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는다. 만약 야전병원이 치유가 아니라 상처를 입힌다면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대에 관한 영감을 찾은 곳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루카 10:25-37)이다. 교황이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그러하듯이 우리 역시 길가로 내려가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고 고통을 주는 이 세상을 새롭게 건설”(67)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선택은 강도들의 편이나 길가에 쓰러진 사람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고 마는 것”(67)이며 우리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따돌림당한 채 삶을 살아가서는 안되기”(68) 때문이다.

 

우리 소비사회의 규범이 그러하듯이 개인의 취향이나 안락함, 편리함에 맞춰 무엇인가를 제공받는 대신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자기 것만 돌보지 않고 남의 것도 돌보”(필리피 2:3-4)라는 도전을 받고 있다.

 

이것이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88)진 존재로서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댓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사랑은 모두에게 열려지고”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동류의식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형제들은 사랑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5장은 사랑이 사람을 차이를 넘어서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서 어떻게 더 좋은 정치에 영감을 불어넣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정치의 장은 솔직한 대화와 범세계적 공동선에 대한 모두의 투신을 통해서 겸손, 호기심, 연민과 같은 덕을 굳건히 실천하는 것에서 많은 실익을 얻게 될 것이다.

 

상호존중, 평등, 호혜적 관심은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며 특히 오늘날 우리의 상처받은 교회에서 더더욱 필요하다. 양성은 우리의 관계와 우리의 실천 속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함께 반복적으로 행하는 활동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만약 지역교회가 성사가 일어나는 장소 이상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생명의 집이 될 것이다. 이 때 전례는 모두를 아우르는 만남이 될 것이요, 안전과 신뢰가 담보되고 진정성있고 개방적인 대화가 가능한, 지지와 책임,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여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협력의 장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구경꾼에서 당사자로 변화되도록 초대받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편이 될 때 연대는 가능한 법이다.

 

모든 형제들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단지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경축함으로써 보편가톨릭의 원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보다 포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통교를 함께 꿈꾸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초대는 사회적 취약성과 분열이 더욱 심각한 이 때 특히 빛을 발하고 힘이 된다.

 

우리의 꿈에 호소하는 것은 코로나 시대 우리가 어느 편에 서기를 바라는지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으로의 초대이며 이 때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교회나 세상에 만족할 수는 없다. 꿈은 우리의 가장 밑바닥의 욕구를 건들기 마련이다. 성경에서 꿈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 우리가 하느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최선의 꿈은 우리가 상상한 것이 가능하게 해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현상태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최악의 꿈은 고통을 흩어주며 우리의 두려움을 가지고 논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모든 형제들반포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꿈을 꾸는 것에서부터 실천으로 움직여야 한다. ‘모든 형제들의 예언적인 단어들이 공동의 전례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이 전례는 환대를 더욱 넓히고 솔직한 대화를 촉진하며 우리 교회와 사회를 치유하고 희망을 전하는 공동의 책임을 실천하는 전례일 것이다.

 

Marcus Mescher (2021104/ National Catholic Reporter) / 번역 김민 SJ 

https://www.ncronline.org/news/opinion/year-after-fratelli-tutti-its-time-church-move-dreaming-d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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