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스페이스 오딧세이 2021: 우리는 왜 우주에 가고 싶어할까?

조현범 121.♡.235.108
2021.11.03 11:11 2,4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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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호의 발사를 보면서

 

지난 1021일 오후 5시에 인공위성 발사용 로켓 누리호가 하늘로 날아갔다. 3단 로켓이 중간에 꺼지는 바람에 모형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 놓지 못했으니 실패했다고 혹평하는 나라도 있었지만, 1단과 2단 로켓은 잘 탔고 꼭대기의 덮개 두 쪽도 계획대로 딱 맞게 떨어져 나갔으니 절반은 성공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년 5월에 다시 발사한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만약 성공하게 되면 내년 12월에는 실제로 쓸 수 있는 인공위성을 달고 올라갈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나중에 발사 장면을 녹화된 화면으로 보았는데 로켓의 동체에 선명하게 누리라는 한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 든 생각은 왜 이름이 누리일까 하는 것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세상을 예스럽게 일컫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썼던 말인 것 같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가 없다. 누리다, 살다, 삶을 누리는 때[], 삶을 누리는 곳[], 그래서 온 세상, 대충 이런 뜻이 모여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말하자면 누리호는 지구호와도 통하는 이름이리라.

 

그러면 누리호 이전에 쏜 로켓의 이름은 뭐였을까? 러시아의 기술을 도입하여 만들었던 나로호가 있었다. 아마 전남 고흥군의 외나로도에 있는 나로 우주 센터에서 쏜다고 하여 나로호라고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한국이 우주를 향하여 로켓을 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나로호 이전에는 다른 나라 로켓을 빌려서 인공위성을 우주에 올려 놓았다. 그 이름들도 찾아보았다. 우리별, 무궁화, 아리랑, 이런 이름들이었다. 누리호나 나로호도 그렇지만, 우주 공간에 올라간 한국의 인공위성 이름치고는 너무 밋밋하지 않은가?

 

 

우주선의 이름에 깃든 신화의 세계

 

미국에서는 우주 로켓의 이름을 지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곧잘 사용한다. 그래서 아폴로, 주피터, 타이탄, 아틀라스, 센타우르, 아레스 등의 이름을 붙였다. 하늘과 땅을 종횡으로 누비는 신들의 이름을 별자리에 붙이던 고대적인 생각이 현대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우주에 가는 로켓의 작명법에도 반영된 것이다. 유럽 우주국에서 쏘아 올리는 우주 발사체는 아리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 왕의 딸로 태어나 영웅 테세우스에게 버림받고 디오니소스 신에게 시집 가서 여신이 된 아리아드네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인도는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 아그니를 로켓에다 붙인다. 이웃 나라 중국의 로켓 작명법은 좀 더 서사적이다. 로켓에는 대장정에서 따온 창정[長征], 인공위성에는 선저우[神舟]라는 이름을 쓴다. 그리고 우주 공간에 짓고 있는 우주 정거장에는 텐궁[天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저우, 텐궁과 같은 이름은 중국의 신화에서 따온 것이다. 해가 열 개나 떠서 사람이 못 살게 되자 화살을 쏘아 아홉 개를 떨어뜨린 영웅 예(羿)는 선저우를 타고 텐궁으로 가서 서왕모에게 신선이 먹는 복숭아를 얻어 왔다. 그런데 예의 아내 항아(姮娥 또는 嫦娥)가 복숭아를 혼자 먹어버리고 달나라로 도망갔는데 그 벌로 두꺼비가 되어 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항아의 이름을 따서 달 탐사 프로젝트를 창어[嫦娥] 계획이라 부르고, 달 탐사선을 창어 1, 2호 등으로 지었다.

 

우리도 로켓이나 인공위성을 만들 때 한국 문화의 상상 세계 속에서 그 이름을 따올 수는 없을까? 가령 <삼국유사>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을 따서 새로운 우주발사체의 이름을 신단수 1호라고 짓는 생각을 해본다. 혹시라도 환인, 환웅, 단군의 이야기가 황당무계한 신화에 불과하며 환웅의 아들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것이 우상숭배를 조장한다고 반대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종 대왕 때 만들었다는 다연발 로켓 발사장치 신기전(神機箭)의 이름을 따서 신기전 1호로 지으면 어떨까? 아무튼 우주로 날아가려는 노력은 인류가 고대부터 간직해 온 상상력의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기술의 정수가 집적되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꿈과 희망이 서려 있기도 하다.

 

 

코스모스의 상상력

 

고대인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 온갖 신화적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또는 별자리의 위치를 보면서 지상에서의 삶을 예견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현대에 들어서 과학적인 우주 탐사가 진행되어도 우주에 대한 상상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물체에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배의 이미지를 입혀서 우주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신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우주선에 붙인다. 어디 그뿐인가? 우주 생성의 원리를 설명할 때 곧잘 등장하는 빅뱅 이론도 무()에서 유(), 혼돈에서 질서가 창조되었다는 고대 신화의 서사 구조와 유사하다. 이런 것들은 과학과 상상력이 서로 만나서 만들어낸 다양한 변주곡이다.

 

인류는 우주를 올려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우주에 가려고 하는 것일까? 우주 개발이니 자원 획득이니 하는 말은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지구 자원이나 아껴서 쓰면 될 것을, 혹은 우주 탐사에 드는 비용으로 지구를 재생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혹시 저 우주의 끝까지 건너가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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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고 푸른 고향

 

1990214일 보이저 1호는 지구로부터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 공간을 시속 64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구에서 보낸 긴급 메시지가 우주선에 도착하였다. 카메라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떠나온 행성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보이저 1호는 60장의 스냅 사진을 찍어서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한 다음에 지구로 전송하였다. 전자 정보로 전환된 데이터는 빛의 속도로 달렸지만 5시간 반이 걸려서야 지구에 도착하였다. 광대한 우주 안에서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 사진이었다.

 

이 계획을 제안한 칼 세이건은 사진에 찍힌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같은 제목의 책에서 그 사진을 통해 인류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좋건 나쁘건 현재로서는 지구만이 우리 삶의 터전인 것이다. 사진은 우리가 서로 더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인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존하고 소중히 가꿀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칼 세이건의 말은 나그네의 시선과 심정으로 떠나 온 고향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과 주변을 성찰하자는 조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태생적으로 방랑자들이며, 천문학은 겸손과 인격수양의 학문이라는 말도 곁들인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을 버리고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고 현명하게 현재를 살아가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결국 우주에 가고 싶어하고 우주를 탐험하고 싶어하는 것은 알지 못했던 영역을 개척하고 지식을 넓혀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딧세우스의 귀향

 

마무리는 영화 이야기로 하자. 1968년에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보면 인류는 2001년 달의 뒷면에서 검은 돌기둥을 발견한다. 인류의 여명기에 문명을 일구는 지혜를 선사했던 돌기둥이 이번에는 목성으로 인류를 초대한다. 우주선 디스커버리호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통제하고 있는데, 승무원들이 컴퓨터의 전원을 끄려고 하자 차례로 승무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선장 데이빗은 컴퓨터의 메인 회로에 들어가서 우주선의 극비 임무를 알게 된다. 그것은 목성에 도착하여 외계 문명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이 마주한 것은 외계인이 아니라 자신의 말년 모습이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우주 오딧세이일까? 원래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딧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영웅 오딧세우스의 귀향 모험담이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면서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왜 가는 것일까? 액면 그대로 보자면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모든 여정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자기 자신의 원천에로 회귀하는 것, 그러면서 여행을 통하여 훨씬 더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탠리 큐브릭이 생각하는 우주 여행도 자기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구도의 행각과 닮아 있다. 주인공은 목적지인 목성에서 외계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대신에 자기 자신과 조우한다. 우주의 끝까지 날아간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외향적인 지식의 추구는 결국 자기에 대한 성찰에로 귀착된다.

 

지구를 유일한 고향으로 여기고 지구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사람도 있다. 또한 지금 여기에서의 삶만이 유일무이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떠나온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어느 한 쪽의 입장에서 다른 쪽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고향을 어디에 두건 인간으로서의 성숙이 전제되지 않으면 현실에 매몰된 삶 혹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삶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를 향한 우리의 관심은 저 아득한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이곳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해준다.

 

극장판 영화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메텔의 도움으로 프로메슘 여왕의 기계 제국을 폭파하고 지구로 돌아오는 귀로의 어느 행성 정거장, 메텔과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온다. “안녕 은하철도999, 그리하여 소년은 어른이 된다. 은하철도999는 철이의 마음 속을 달렸던 청춘이라는 이름의 열차였던 것이다.”

 

 

조현범 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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