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난민] 이주라는 이름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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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제주도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어시장에 갔었다. 어시장에서 매우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다. 무슬림 청년이 생선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대뜸 나는 그가 한참 이슈가 되었던 예멘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작년 500여명의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입국했던 사건이 기억날 것이다. 그 500여명의 예멘 난민들 가운데 한 명을 보게 된 것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수백여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한국사회가 얼마나 놀랐는지. 사실 오랫동안 한국의 경우 이주의 역사에서 소외된 편이었다. 물론 상고사나 중세사의 자료를 보면 한반도에 이주의 역사가 없었던 편은 아니었다. 발해 멸망 직후 대규모 이주가 있었고, 명청 교체기 동안 역시 작은 숫자이긴 하지만 이주의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과 달리 한반도는 꽤 이주의 역사 혹은 교류의 역사에서 소외된 편이었다. 한반도에서 이주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일본 식민지배 시기였다. 그 시기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드물게 중앙아시아로 한국인들을 보내는 이른바 ‘인력 송출국’이었다.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여전히 인력송출국이었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 등의 국가로 향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학자들은 1988년을 한국의 이민의 역사에서 전환점으로 본다. 이 해-정확히 말하면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한국은 ‘인력 수입국’이 되었다. 이른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뒤이어서 ‘외국인 색시들’이 들어왔다. 결혼이주민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뭐, 여기까지는 그나마 무난했다. 여전히 한국에는 힘들었던 1970년대 중동국가에서 일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기억이 존재했고,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이주민들을 대했으니까. 하지만 무슬림이라니! 이 경우에는 사정이 아주 달랐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예멘 난민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뒤를 이었다.
사실 역사를 찾아보면 한국의 무슬림의 역사도 꽤 된 편이다. 이미 고려 시대 벽란도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존재하였으니 말이다. 이런 편린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한국 무슬림의 역사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 파병된 터키군의 이맘-무슬림 종교지도자-이 일종의 선교사와 같이 포교를 하면서 한국 무슬림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재 한국의 무슬림의 인구는 20만명에 달한다. 그 중 한국인 무슬림의 숫자는 3만명이다.
사실 한국 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 시피 했다. 하지만 2004년 김선일 씨 참수사건 이후 한국에서의 무슬림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렇지만 한국 내 무슬림은 마치 유령처럼 그 존재감이 어렴픗한 편이었다. 이태원이나 혹은 공장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상황이 2018년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그것도 제주도에 도착한 500여명의 예멘 난민들에 의해서 말이다.
예멘 난민들의 존재가 드러난 직후 2018년 6월의 통계에 따르면 예멘 난민 입국에 대한 찬반의 비율은 반대 49%, 찬성 39%였다. 이어서 정부가 예멘 난민들의 취업을 선택적으로 허용했을 때-사실 이는 매우 예외적인 조치이다. 난민지위가 부여받기 전에는 원래 취업은 금지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여론이 안좋았다.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제주도의 시장에서 목격했던 한 예멘 난민은 그런 복잡한 사정 속에 있던 터였다.
제주도에서의 체험은 그런데 희안하게도 무엇인가 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이 기시감(旣視感)의 밑바닥에는 시모노세키에서의 경험이 놓여 있었다. 시모노세키에는 예수회 일본관구에서 운영하는 노동센터가 있다. 언덕 위에 있는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건물이다. 이 센터에 종종 갈 일이 있었는데, 여기의 책임자로 일하는 일본인 예수회원- 준 나카이 신부-는 희안하게도 한국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하면, 거의 매일 옆동네의 조선학교-바로 총련계에서 운영하는-에 가서 아이들과 축구를 할 정도로 좋아했다.
준 신부의 소개로 나 역시 조선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에게는 재일교포라는 말은 참 익숙하다. 일단 내 친척들 가운데 일부는 재일교포로 일본에 있다. 그런데 일본을 왕래하면서 재일(在日)이라는 단어가 꽤 두꺼운 단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일이라는 단어는 단지 일본에 머문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이 단어 혹은 자이니치라는 일본발음에는 풍부한 감정이 담겨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살면서도 일본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혹은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느낌, 일본사회에 존재하지만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혐오의 느낌, 일본이나 남한, 북한이라는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어느 곳에 소속될 것인가에 대한 망설임의 느낌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단어이다. 재일 혹은 자이니치는 결코 중립적이거나 기술적(記述的)인 단어가 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마치 제주도의 예멘 무슬림처럼 말이다. 우리 안에 있는 낯선 존재, 위험한 존재, 우리의 단일성에 도전하는 존재인 것이다.
금년 2월 시모노세키에 다시 갔다. 시모노세키에 있는 야마구치 조선학교 공동체에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 더 세련되게 말하면 일본 사회의 주변화되고 소외된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연대를 확인하기 위해서. 대단히 멋진 경험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주었고 환대해주었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문화적인 차이를 경험했다. 특히 그들의 낯선 말투에 함께 갔던 순진한 대학생들은 처음에는 얼어붙었고-처음 들어보는 북한식 말투였을 테니까 이해가 간다.- 다음에는 재미있어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말투가 정상이고 그들의 말투는 교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표준어라는 말이 얼마나 정치적인 언어인지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리고 조선학교가 일종의 문화의 섬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는 섬이라는 사실 말이다. 조선학교 아이들이 보여준 문화적 풍요로움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 아이들은 한편으로 민요와 같은 ‘조선문화’와 BTS와 같은 ‘남조선문화’를 스스럼없이 향유했다. 함께 같이 갔던 대학생 한 명은 이런 말을 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민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네요.’
얼마 전 공동체에서 한국에 유학온 베트남 학생들 한무리와 미사를 같이 했다. 제대에서 바라본 그들의 현존은 나에게 풍요로움으로 다가왔다. 제주도의 예멘사람들, 시모노세키의 자아니치들, 화곡동의 베트남 유학생들의 현존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풍요로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현존은 우리의 낯섬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투명한 거울이 된다. 이들의 현존 앞에서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존재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민낯의 감정일 뿐이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부소장
Coordinator of JCAP Migration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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