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자선이 아니라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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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온갖 형태의 빈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세계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1년의 준비 끝에 2014년 10월 첫 번째 세계 민중 사회운동 회의가 열렸다. 이후로 10년 동안 사회-민중운동 단체와 교회는 ‘글로벌 프롤레타리아트(전 지구적 무산계층)’- 폐기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억압받고 배제되고 착취당하며 심지어 인신매매와 노예 상태로 전락한 사람들 -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새로운 사회-환경 문제에 전면적으로 대응하는 목표를 세우고 함께 해결을 모색해 왔다. 이 여정을 정리한 문헌 「세계 민중운동 회의와 우리의 사회사상: 프란치스코 교황과 민중운동 10년」도 지난달 바티칸에서 나왔다.
이 회의는 아픈 친구를 예수께 데려가기 위해 지붕을 뚫었던 친구들처럼, 땅 아래 묻혀 버린 참담한 빈곤 현실을 다시 한번 지상의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온 세계 가난한 이들을 대표하는 참가단이 로마에 와서 교황과 함께 깃발을 들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슬로건이 쓰여 있었다. 땅(Tierra), 집(Techo), 그리고 일(Trabajo)이다. 스페인어 앞 글자를 따서 세 개의 ‘T’로 불리기도 한다. 이 권리는 기본권이지만, 교황은 한 발 더 나가서 이를 ‘신성한 권리’라고 불렀다. 긴급한 기본 필요이면서, ‘구원을 향한 규범’이기도 해서다. 이 세 가지는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훨씬 뛰어넘어서, 미래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사의 과제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줄곧 목소리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주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라도 자녀를 위해 바라는 것,’ 모든 이가 마땅히 지녀야 할 땅, 집, 그리고 일을 얻기 위한 희망과 헌신의 목소리를 남김없이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땅, 집, 일을 향한 열망은 곧 좌절과 고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길을 얼마쯤 걸어왔으며,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는 물음은 오히려 민중운동 회의의 열망을 고무했다. 가난한 이들이 단지 불의를 겪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단지 기부와 연대에 만족하지 않는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지 않는다. 주체가 되고 싶어 하며, 또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온전한 삶의 주체이며 하나의 세계가 되기를 바라신다. 출발점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면 새로운 움직임의 전망도 떠오를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의 공동 창조자로 인식하지 않으면 이들의 절규를 들을 수 없다. 이 외침을 듣고 함께 할 준비가 되어야 만남이 이루어진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이다. 이를 삶의 지표로 선택한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니, 참된 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의 ‘아이디 카드’이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물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옷을 입혀주며, 어떤 사람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해야 한다(마태오 25장).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은 약자와 가난한 이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하느님의 강생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의 기본적이고 성스러운 필요를 채워 넣으라고 부탁하시는 것이다.
매년 12월에는 각 분야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모여 ‘홈리스 추모행동’ 기간을 연다. 2일 선포식을 시작으로 마지막에는 동짓날 서울역 앞에서 추모제를 연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간 홈리스 사망자들의 아픈 삶을 애도하는데, 매년 4-5백 명을 넘는다. 극심한 빈곤, 그 고립과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편치가 않다. 동짓날은 대개 한 해 가장 추운 날이다. 빈곤은 아기 예수에게도, 빈민에게도 아프고 시리게 덮친다. 왜 나는 그 자리에 없었는지 묻고 있다.
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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