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국가 폭력의 트라우마와 우리의 희망
- - 짧은주소 : http://advocacy.jesuit.kr/bbs/?t=fF
본문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질 않는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은 권력을 일방적으로 그리고 위협적으로 행사했다. 그래서 나는 몇 달 동안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우울함으로 인한 무기력에 빠졌다. 마침내 그는 지난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이 거의 반세기 만에 ‘비상계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두렵고 무서움으로 자신이 비인간이 되었던 순간의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밤잠을 설쳤다.
잠시 우리의 시간은 과거로 돌아갔다. 다행스럽게도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했고 비상계엄은 해제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2월 14일 국회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그를 탄핵했다. 이 일련의 일들은 암울함을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최상의 결과이다. 암울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품은 현재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절망적으로 우울해질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다. 그들의 시간은 아픈 과거에 멈춰 그들에게 현재도 없다. 이들에게 현재란 아픈 과거이다. 믿음은 그들에게 아픈 과거를 의미 있는 고통으로 승화시켜 현재를 살게 한다. 그리고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들은 미래가 없지만 그들의 현재의 시간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희망은 우리의 사랑과 기쁨과 관련한 과거의 기억이 미래에도 이어지도록 해주는 능력이다. 그들의 현재는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그리고 미래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오직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놓여 있는 것에서만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싸우며 산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그러므로 현재의 혼돈스러운 상황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창세기 1,1-2,4)는 깊은 어둠, 즉 깊은 혼돈에서 시작한다. 창조 전 세상은 깊은 어둠에 쌓여 있었고 그 위에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다. 우리가 혼돈을 경험한다면 이는 다름 아닌 변화, 창조의 전 단계이다. 하느님의 영은 그때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신다. 사실 창조는 먼 옛날 한번 일어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그 변화와 창조를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한 또 하나의 일이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다. 그는 지난 7일에 있었던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내용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의 소설의 주제는 세상의 폭력성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그 폭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 폭력에 인간이 어떻게 저항하는지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해서 설명하며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목표를 말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우리의 슬픈 역사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많은 선의의 시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를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과 노벨상 수상을 비난했고,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을 음해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극우 유튜브와 가짜뉴스의 광적인 시청자들일 것이다. 심지어 탄핵당한 대통령의 탄핵 전에 있었던 대국민 담화도 그가 얼마나 깊이 가짜뉴스에 중독되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화면’에 집착하고, 또 피상적이고 폭력적인 가짜뉴스에 집착하여 영혼까지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강이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말한 문학의 의미에 따르면, 아마도 문학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그런 행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행위들을 반복하면서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된다. … 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여분의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사회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또 기득권자들의 정치적 이익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어 수치를 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수치를 내면화하여 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 규범에 순응하여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폭력성이다. 또 우리는 문학을 여분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즉 문학을 하면 배곯는다고 하며 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문학적 상상력은 깊지 않아 삶을 대하는 방식이 천박하고 매우 물질적이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을 화려함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인생의 성공은 영광이 아니라 인내다.”
문학의 의미, 힘, 영향력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내적 힘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양성에서 문학의 역할’이라는 서한에서 “‘문학과 예술도 …… 인간 본연의 특성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밝히려고 힘씁니다.’(사목헌장, 62항) 실제로 문학은 우리 일상의 현실과 그 열정과 사건에서, 그리고 우리의 ‘활동, 일, 사랑, 죽음 그리고 우리 삶을 채우는 온갖 불행한 일’(칼 라너)에서 단서를 얻습니다.”라고 확언한다.
우리는 천당과 지옥과 같은 상황을 오가는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늘 희망을 갖고 있음을 요 며칠을 통해서 확인했다. 특히 탄핵을 요구하며 모여든 시위 현장에서 젊은 세대의 생기발랄함은 그들이 현재를 충분히 즐기면서 자신들의 시간이 미래를 향해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생기발랄함으로 우리는 요 며칠 동안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를 탄핵하라고 외쳤고 그는 탄핵되었다. 이제부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를 파면하라고 외쳐야 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