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식민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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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시장 모또시마 히또시는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발언으로 우익의 총격을 받았다. 오키나와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한 치비나 쇼오이치는 천황제에 반대해 동네 소프트볼 경기장에 걸려있는 일장기를 불태워버린 사람이다. 예전 일이고 또 드물기도 하지만, 누구나 과거를 부정하며 잊으려 할 때 자신의 현재의 삶이 과거와 연루되어 있다는 역사의식을 자각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국과는 어떤 ‘두터운’ 관계에도 있지 않았던 타인들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신들의 국가가 자행한 식민 지배를 기억해야 할 어떤 책임도 없다는 뜻인가?
기억의 윤리는 무관심했거나 혹은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확장시키는 능력이다. 친근하고 두터운 관계를 넘어서 관심의 범위를 확장해야 할 윤리적 책무를 지녀야 할 때가 있다. 왜 과거의 불의를 기억해야 하는가?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기억은 윤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희생자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보상이다.”
최근에 고위 공직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기괴한 언행을 쏟아내고 있다. 식민시기 개발로 근대화가 성취되었다는 오랜 거짓말에 더해 식민지 피지배자인 한국인들이 일본 국적자라는 새로운 헛소리가 나오고, 일본이 과거 역사에 대해 거듭 사과하면서 피로감이 쌓여 있으니 ‘일본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완벽한 망각으로 윤리를 거부하는 이들의 언행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식민 지배는 그 자체로 해악이다. 식민시기에 경제가 발전했든 안 했든, 국적이 어떻든, 어떤 위안부가 일제 군인에게 동지애를 느꼈든 아니든, 식민통치 체제는 ‘지배, 강제, 착취’일뿐이다(유엔, ‘식민지국가와 민족에 대한 독립 부여 선언’, 1960).
식민주의는 영토를 점유하고 행동을 통제하며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체제이다. 식민주의 권력은 인종적, 문화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문화와 관습을 강제로 주입한다. 또 폭력과 무력을 사용해 세금을 징수하고 자원과 노동을 착취한다. 식민 지배 국가가 착취한 자원과 노동은 식민 지배가 끝난 뒤에 그 후계자들의 번영과 안락함의 토대가 되었다. 제국의 부는 식민지에게 진 빚이다. 이런 역사적 부정의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평화와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양쪽 모두에게 필요한 인간다운 번영도 가능하지 않다.
‘기억하는 공동체’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과정에 영감과 활력을 불어 넣어 앞으로 다가올 희망의 공동체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를 부정하며 천황제, 신사참배 같은 굳은 이념을 동원해 ‘기억의 작업’에 저항하며 제국의 병리를 내면화시켰다. 한국의 지배 엘리트 상당수도 감염되어 있을 만큼 강력한 병이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지 80년 되어가지만 탈식민화는 아직 미완의 과제이다.
이제, 우리 사회를 탈식민화하는 노력이 하느님 백성의 예언자적 과제에 속하게 되었다. 예언자는 무엇보다 아픈 이들의 탄식에 귀 기울이라는 소명 안에 사는 이들이다. 예언자로서의 제자들은 식민 지배의 후유증으로 상처 나고 아파하는 이들 안에서 울려 나오는 성령의 소리에 반응하며 탈식민화의 실천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불의를 전복하고 인간다운 복리를 회복하려면, ‘식민지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이번 칼럼은 가톨릭평화신문 '시사진단' 코너에도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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