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홈리스로 머무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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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 바로 옆에 창신동 쪽방촌이 있다. 바로 길 건너 고급 호텔과 화려한 쇼핑몰에는 사람들로 넘치고 분주하지만, 여기는 조용하다. 무너지고 잃어버린 폐허의 조용함이다. ‘홈리스행동’ 활동가들과 함께 서울 곳곳의 쪽방촌을 방문하다 보면 이 세상은 빈곤과 풍요, 둘로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크지도 않은 낡은 건물에 한두 평 남짓한 방들이 수 십 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누구라도 여기 와서 보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런데 왜 여기 사람들이 사는가?
거리에 사는 노숙인을 포함해 쪽방, 고시원, 숙박업소 객실 등 ‘비적정’ 주거공간에 사는 이들을 홈리스라 부른다. 홈리스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예전에는 집을 갖는 것이 모두의 권리였지만, 이제는 소수의 특권이다. 사회적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은 자산, 곧 집과 땅이다. 주택 가격을 낮추면서 생활의 질을 끌어올릴 정책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집부자, 땅부자인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들이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집은 체제의 문제이면서 욕망이어서 너무나 집요하다. 이 시대는 거의 모든 사회적 자원을 이윤을 내는 상품으로 바꾸게 구조화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집과 땅은 뒤틀어진 가치의 전형이 되었다. 집은 막대한 이익을 내는 상품이다. 이 욕망은 모두의 내면에 뿌리박혀 있어, ‘종교적 열망’과도 같다. 물신숭배의 열망을 사회체제가 지지하며 강화한다. 아무런 제한 없이 부를 추구하고 축적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누가 죽어도, 누가 버려져도 아무 상관없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가진 것과 관계없이 최소한의 안전과 복리를 나누는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집은 물건을 소유하는 그 이상이다. 집은 안전감의 원천이다. 거기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자녀를 돌보고 온전한 삶을 형성하는 관대하고 따스한 감정을 키운다. 집에는 주소가 있다. 사회와 관계 맺을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안정된 집은 자신의 역사와 연결해 준다. 집은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기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집을 떠나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향수(nostalgia), 고향을 그리는 아픔이 된다. 집은 인간의 삶에서 이렇듯 중요한 연결을 의미한다. 집을 잃은 사람은 물건 이상의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소멸하는 것과 같다. 홈리스가 뭔가? 주거가 없는 이들이다. 홈리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집’이다.
집을 상실한 아픔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다. 우리는 서로의 필요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만,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불평등은 우리가 결코 하나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평등의 핵심 증상이 홈리스다. 홈리스를 만드는 것은 빈곤이 아니라 우리의 부유함이다. 뜨거운 한낮, 고시원에서 쫓겨나 어느 거리 한 모퉁이를 서성이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누리는 특권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우리가 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지녔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염려는 특별히 약하고, 억눌리고, 주변으로 밀려나고, 집 없는 이들을 향해 있다. 모두 다 풍요 속에서 사라져 버려 안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는 부재하면서 다른 곳에는 존재하는 삶의 기술을 연마한 이들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 하느님 자신이 안 보이는 분이며,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홈리스’가 되셨다(강생). 그래서 예수도 홈리스인 하느님을 드러내려고 홈리스로 살았다. 하느님께서는 현존할 장소들을 찾으며 이곳저곳으로 움직이시는 중이다. 그러다 항상 놀라운 시간에, 놀라운 공간에 나타나신다.
요한복음서 첫 장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한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를 고쳐 쓰면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홈리스들 가운데 천막을 치시고 자신의 머리 둘 곳도 없애 버렸다. 홈리스를 마음 한 편에 두는 것은 현존하면서도 부재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와 함께 하는 일이다.
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이번 칼럼은 가톨릭평화신문 '시사진단' 코너에도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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