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성찰] 너와 나를 나누는 경계에 관한 성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 - 짧은주소 : http://advocacy.jesuit.kr/bbs/?t=cL
본문
너와 나를 나누는 경계에 관한 성찰: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맥락
대구 북구 대현동의 이슬람 사원 건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경북대학교가 인접한 이 지역은 여러 나라에서 유학 온 무슬림 학생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입니다. 학생들이 주축이 된 무슬림 커뮤니티는 2014년 대현동의 한 주택을 매입해 예배 장소로 활용해왔고, 최근 구청의 허가를 받아 2층짜리 사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의 반대와 이어진 갈등으로 현재 공사는 중단된 상태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공부하는 학교와 살고 있는 주거공간과 가까운 곳에 예배 장소를 두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이들은 이미 오랜 세월 학교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무슬림에 대한 우려와 오해로 이슬람 사원이 자신들의 터전에 생기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슬람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천주교 성당이나 개신교 교회, 불교 사찰이 들어설 수 있는 지역이라면 이슬람 사원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실제로 무슬림 공동체는 법적 절차에 따라 사원의 신축 허가를 받았고, 이들의 권리는 보장받아야 합니다. 물론 극단주의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과 익숙하지 않은 무슬림에 대한 낯섦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아닙니다. 낯설고 새로운 것,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늘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복음서 10:29-37
성찰
얼마 전 반포 1주년을 맞이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회칙 ‘모든 형제들’ 제2장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가 이 비유의 맥락 너머를 짚어보며 형제애를 향한 예수님의 부름을 성찰하는데 할애되어 있습니다. 닫힌 문을 열고 경계를 넘어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모든 형제들’의 초대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깊은 영감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 시대의 사회에서 ‘이웃’이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를 짚어봅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웃’은 보통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리켰으며, 사람들은 도움은 그 누구보다 자기 집단과 자기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당시 일부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이 멸시받을 만하고 불결하기에 도와주어야 하는 가까운 사람에 포함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전제를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누가 우리에게 가까운 이들인지 자문해 보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이웃이 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 80항 참고)
유독 무슬림에 배타적이고, 이슬람 사원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의 이면에서 무슬림은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경계 나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안은 그가 우리 무리에 속할 수 있는지는 관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의 서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집트의 말리크 알 카밀 술탄을 방문한 일화로 시작합니다. 언어와 문화, 종교의 차이 탓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방문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3항), 성인은 교리를 강요하는 설전 대신 하느님의 사랑만을 전하였고(4항),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공격이나 분쟁을 피하고, 모든 이를 품어 안고자 열망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황은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형제적 사회’라는 꿈을 불러일으켜 많은 열매를 맺는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지금 어떤가요? 이 달의 매달성찰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누가 이웃인지 묻기보다, 먼저 이웃이 되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기억하며 여전히 우리를 엄격히 갈라놓는 나와 너의 경계에 관해 성찰합니다.
기도를 위한 질문
1.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우리의 신앙과 그의 신앙이 서로의 영혼이 만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경험은 없었나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길이 아니라 너와 나를 경계 짓는 도구로 신앙에 기댄 적은 없는지 함께 성찰해 봅시다.
2. 무슬림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모든 경계를 허물고 모든 이를 품어 안고 자 열망하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르고 있나요? 혹시 낯섦과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요?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