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성찰] 하느님 나라의 공정을 향한 성찰: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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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느님 나라의 공정을 향한 성찰: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오 20:16)
맥락
‘공정’이 시대의 화두라고들 합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경쟁의 결과에 따른 격차를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오늘날 청년들에게 시험 결과에 따른 줄 세우기, 경쟁에 따른 분배가 곧 ‘공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씁쓸하고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 ‘능력 또는 가시적인 결과에 따른 분배가 곧 공정’이라는 논리에는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지위의 격차’를 손쉽게 ‘능력의 격차'로 정당화합니다. 능력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는 모든 사람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수 없다는 당연한 전제에 관한 고려를 손쉽게 생략합니다.
소수자를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며 공동체와 더불어 가는 과정의 노력은 능력주의에 내재된 효율성과 성과 중심의 가치에서는 충분히 빛을 발하기 어렵습니다. 시험과 경쟁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공정한 시험, 공정한 경쟁에 몰두하는 청년들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능력주의’에 기반 한 공정 개념이 이미 모든 자원을 누리는 이들의 특혜에 명분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합니다.
성경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0:1-16
성찰
마태오 복음의 해당구절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일견 우리에게 익숙한 비례적 공정함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8시간을 일한 사람이 받는 몫이 1시간을 받는 사람의 몫과 같고 이는 불공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당혹감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애를 써보면 새로운 성찰을 하게 됩니다.
만약 도저히 8시간 동안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가요? 아이가 아파서 혹은 배우자가 아파서 병간호를 해야 하기에 8시간을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상황이 있다면? 복음 속의 노동자처럼 아침부터 일하고 싶으나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해 일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요? 또는 장애가 있어서 비록 8시간을 채워도 그 노동의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공정함의 감각에는 모든 이의 조건이 동일하다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이 대전제 자체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가 처한 상황과 조건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8시간을 채워 일하지 못한 이들 또한 삶을 계속하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감각하는 ‘공정함’보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엇이 부족하며, 이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얼마나 일했고, 그 일의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이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가 될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눈에는 어떤 아이이든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나의 노력이 남들만큼 또는 남들보다 더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상 심리, 나보다 남들이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이 갖는 것만 같은 상대적 박탈감이 우리를 진정한 의미의 공평하고 올바른 세상에서 오히려 멀어지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기도를 위한 질문
1. 하느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스스로 획득한 권리인양 착각하며, 경쟁의 논리로 약자와 소수자를 배척한 적은 없는지 우리의 마음을 잘 들여다봅시다.
2.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라는 복음 속 말씀은 우리의 기도 안에 어떤 울림으로 다가오는 지 성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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