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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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성찰가이드]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십니다"

인권연대연구센터 121.♡.226.2
2025.11.13 13:53 1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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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성찰 가이드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십니다”

 

 

맥락


2025년 우리는 ‘희년’을 지내면서, 제9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합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올해 담화에서,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의 마음을 시편 저자의 고백과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십니다”(시편 71[70],5). 이 희망은 인간의 힘이나 재산에 근거하지 않고, 언제나 성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한 희망입니다.

 

교황은 특히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이러한 희망의 증인이라고 강조합니다. 권력과 소유에서 평안을 얻지 못하는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만 참된 보화를 찾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반대로,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느님을 외면한 풍요는 결국 우리를 더 공허하게 만들 뿐이라는 경고입니다.

 

또한 담화는, 가난이 단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과 역사적 책임이 얽혀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사랑은 가장 큰 사회적 계명이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자선이기 이전에 정의의 문제입니다. 병원, 학교, 요양원, 쉼터, 무료급식소, 저소득층 학교와 같은 다양한 기관과 자원봉사 활동은, 세상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보여 주는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카리타스 설립 50주년을 맞아 시작한,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캠페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으로 파견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희망을 나누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는 여전히 주거 양극화와 비주택 거주, 고시원·쪽방·비닐하우스·공공임대주택 등의 주거 현실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삶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화의 길일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내는 우리는, “희망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법을 가난한 이들에게서 배우고, 동시에 구조적 가난의 뿌리를 함께 마주해야 합니다. 이 날은 일회적인 나눔 행사로 끝나는 날이 아니라, 본당과 가정, 단체가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성경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십니다.”
— 시편 71(70),5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우리가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 1티모테오 4,10." 

 

 

성찰

 

가난한 이들은 무엇보다 “희망의 증인”입니다. 삶의 불안과 결핍, 차별과 소외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가 쉽게 당연하게 여기는 안전, 먹을 것, 주거, 돌봄이 무너진 자리에서조차, 주님께 피신하고 의지하는 이들의 믿음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줍니다.

 

교황이 말하듯,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가난입니다. 돈과 성공과 소유에만 기대어 살아갈 때, 우리는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여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더 큰 허무와 불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은, 진정한 희망이 어디에 뿌리내려야 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만이 너의 희망이시다.”라고 몸으로 말해 줍니다.

 

가난은 또한 구조적 현실입니다. 노동과 주거, 교육과 의료, 사회보장과 이민 정책 속에서, 많은 이들은 처음부터 불리한 조건을 안고 출발합니다. 저임금·불안정 노동, 과도한 주거비, 불충분한 안전망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벽입니다. 이 벽 앞에서, 우리는 가난을 단지 “도와야 할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할 신앙적 과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황은 사랑을 “가장 큰 사회적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공동선을 향한 선택이고, 역사적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우리의 사랑은, 밥 한 끼 나누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다시 굶주리지 않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참여와 연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거, 노동, 교육, 건강, 평화의 영역에서, 교회는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희망의 순례자”로서 우리의 순례는, 우리의 생활양식과 시선을 바꾸는 여정입니다. 본당 울타리 안에 머무르던 시선을 넘어, 고시원과 쪽방, 임대아파트, 요양시설, 이주 노동자 숙소, 거리와 쉼터 속으로 시야를 넓히는 길입니다. 그 자리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이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나서는 여정입니다.

 

빈민사목의 전통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사는 교회”를 제시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대상, 프로그램의 수혜자로만 대할 때, 우리는 여전히 거리감을 유지한 채 ‘안전한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우리 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그들의 목소리와 지혜가 본당의 결정과 계획에 스며들 때, 교회는 비로소 복음적 가난을 배우게 됩니다. 그때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창의적 주체’가 됩니다.

 

희망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입니다. 우리가 지갑을 열고 시간과 재능을 나누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구조적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낼 때 희망은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나누며, 누구와 함께 서 있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정말 희망의 표징이 되고 있는가?" 

 

 

질문

 

1. 나는 내 삶의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희망을 배우고 있나요?

2. 우리 공동체(가정·본당·단체)는 가난한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함께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나요?

3. 우리 본당, 우리 단체는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고 구조적 가난을 줄이기 위해 어떤 구체적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4. '희망의 순례자'로서 나는 어떤 작은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난한 이들의 상처와 눈물,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주님, 우리 마음이
풍요의 환상과 무관심에 갇히지 않게 하시고,
당신만이 우리의 희망이심을 깨닫게 하소서.

 

가난한 형제자매를
불편한 손님이 아니라
복음의 스승이자 희망의 주인공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 몸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의 자선이 일시적인 동정에 머무르지 않고
정의와 연대, 구조를 바꾸는 용기로 이어지게 하소서.
주거와 노동, 교육과 건강, 평화의 영역에서
가난한 이들의 권리가 존중받도록
우리의 목소리와 선택을 봉헌하게 하소서.

 

희망의 순례자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의 희망을 전하는
작은 표징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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