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N번방에는 무엇이 있었나?

김민SJ 163.♡.183.94
2020.04.06 18:28 7,7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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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를 생각해보자. 유대인, 집시, 정치범, 사회주의자, 동성애자의 대량학살에 대해서 말이다. 예전에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들을 보다가 무척이나 놀랐던 것이 학살의 대상자 중에서는 ‘work-shy’라는 이들도 있었다. 나처럼 게으름뱅이 혹은 일하기 싫어하는 한량들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것. 당시 대학원생이라는 한량이기에는 뭔가 좀 더 떳떳하지만, 실상은 한량과 거의 다름없었던 우리들에게 갑자기 홀로코스트가 텍스트 속에서 튀어나와 문자 그대로 으스스한느낌으로 다가왔다. 포스트 홀로코스트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홀로코스트가 특정한 인종 집단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특정화하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 동성애자, 유대인, 집시, 이 모든 라벨은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게도 적용된다. 하지만 N번방에 관한 우리의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와 관련되어 있다. 질문을 하나 해보자. 홀로코스트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이들은 모두 천하의 개쌍놈들인가? 피에 굶주린 나치의 특수부대들의 짓이라면 우리의 양심이 조금 편해질 것이다. 문제 있는 이들이 문제 있는 행동을 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이런 짓을 했다면? 이렇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평범함의 영역들이 허물어지게 되니까. 언제든지 우리의 일상성이, 우리의 무구함이 광기로 인해서 바스러질지 모르니까.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광기의 가해자들이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의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미국의 사회학자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가까운 속성이 어쩌면 우리의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홀로코스트 가해자의 특정 그룹을 연구했다.

 

101 경찰 대대가 그것인데, 폴리차이 바탈리온 101(101 경찰대대의 독일어 표기)은 독일의 경찰관들을 징집하여 특별대대로 편성한 부대다. 명칭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경찰대대의 목적은 점령지의 치안에 있었다. 문제는 일부 경찰대대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이들의 일기와 편지들을 분석하면서 이들의 행동은 병리적이었지만 이들의 정신과 일상생활은 정상적이었다는 관찰을 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국가의 충실한 공무원으로서 사명감과 윤리의식이 높았고 실제로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친절한 이들이었다. 존경받을 만한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점잖은 신사들이 유대인들을 총살하고 가스실로 실어 나르고 학대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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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대대의 부대원들은 학살을 끝내면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뒤져서 기념품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이 사진에서는 빵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빵은 학살된 유대인이 지니고 있던 빵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을 악마화한다면, 즉 윤리의식이 결여된 소시오패스 혹은 사이코패스라서 그랬다고 치부해버린다면, 한나 아렌트나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화두를 놓치게 된다. 평범한 이들이 어쩌다가 악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아마도 우리는 그럴 놈이 그랬다는 정도로 만족해하며 악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인 문제 정도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왜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협력자가 되었는가? 왜 그들은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를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는가?

 

용인하기 힘든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취하는 방법은 비난과 단죄다. 요즘 유행하는 방식은 소시오패스라는 라벨링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사태에 대해서 문제를 일으킨 이가 원래 그렇다는 라벨을 붙이면 우리의 마음은 편해진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 의해서. 포스트 홀로코스트의 시대에 홀로코스트를 섬뜩하게 연상시킨 사례가 코소보와 르완다에 있었다. 코소보와 르완다에서 종교나 부족이 다른 이들을 학살했던 가해자의 상당수는 같은 마을에서 살던 이웃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문화와 정신에 어떤 병리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줄곧 난민 혐오와 같은 미움의 문제, 정의롭지 않은 경제체제의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여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제의식은 일관성이 있었다. 비록 명칭은 달랐지만 말이다. 자비의 해를 전후해서는 우리 사이에 팽배해 있는 무관심의 문화에 대해서 지적했고, 또 어느 때는 특권과 배제의 문화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일관되게 이야기했던 것은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위해 운영했던 절멸수용소들이 굉장히 공들여 시스템을 향상시킨 것은 어떻게 하면 희생자들을 익명화할 것인가의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희생자들이 한 인간이자 인격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망각할 것인가. 이에 따라 학살의 메커니즘은 얼굴을 맞대는 총살에서 내연기관을 통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나중에는 치클론 B와 같은 가스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가스실로 내몰리는 동선 역시 시행착오에 의해서 계속 업그레이드되었다. 모든 진화와 업그레이드의 요체는 그들의 인격성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 있었다. 마치 도살장의 모든 살육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듯이. 그래서 공장의 노동자들이 무감각하게 물건을 조립하는 것처럼 학살의 집행자들은 자기 일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성공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이들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렇게 고통에 공감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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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자 한겨레 그림판 (권범철 기자)

 

N번방에서 일어났던 일은 이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N번방의 가해자-운영자와 콘텐츠를 소비한회원 모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동시에 그들 대부분은 우리와 똑같이 학교나 직장에서 생활하고 가정에서 아무 일 없는 듯 평범하게 가족들과 식사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홀로코스트의 경찰대대의 부대원들처럼. 그렇기에 그들에 대해서 공부도 잘했고, 말수가 없어 조용한 친구라는 증언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미성년자들조차 재미있는 인터넷 콘텐츠를 소비하듯이 성적으로 착취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학대하고 착취하고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던 모든 이들의 인격과 역사를 화장실의 화장지처럼 취급하였다. 우리는 좀 더 N번방에서 일어났던 일들, 가해자들의 심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비난과 단죄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에서도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빌어먹을 우리 사회와 문화에 어떤 병리적인 문제가 숨어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마치 한나 아렌트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홀로코스트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사회와 정신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듯이 말이다.

 

김민 신부(예수회)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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