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하늘에서 본 세상은 어떨까?

김정대SJ 121.♡.235.108
2022.08.26 17:31 1,77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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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18일 나는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화이트진로 화물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에 다녀왔다. 기자회견 전 나에게 전화를 한 동료 신부에게 기자회견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가 나에게 물었다. “거기도 올라갔지?”

 

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극한 상황에 자신들을 몰아넣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고 슬펐고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너무 화가 났다. “거기도 올라갔지?”라는 말과 함께 내가 보았던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온종일 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화물연대의 총파업이 지난 614일 마무리됐다. 그러나 화물연대 소속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들은 운송료 인상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운송료가 십수 년째 제자리여서 자신들의 실제 수입이 줄어들어 안전 운행을 위한 조치도 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측과의 협상이 진전이 없자 노동자들은 지난 816일 하이트진로 본사 로비와 옥상을 점거해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노동운동 역사에서 처음으로 고공농성을 한 사람은 강주룡이란 여성 노동자이다.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투쟁의 지도자였던 그는 1931529일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 회사의 일방적인 임금 감하 결정에 대항하여 임금 감하 저지 투쟁을 진행했다. 그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조선인 남성 노동자의 1/2 수준이었고, 일본인 남성 노동자와 비교하면 1/4 수준으로 열악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이은 단식투쟁이 진행되었음에도 회사가 일방적인 임금 감하를 철회하지 않자 그는 투쟁의 마지막 수단으로 고공농성을 결심했다. 결국 그와 다른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연대투쟁으로 임금 인하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한 신문은 당시 그 상황을 乙密臺上滯空女(을밀대상의 체공녀)’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인색한 사용자는 차고 넘친다.

 

체공녀강주룡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많은 노동자가 하늘로 올랐다. 내가 찾아간 현장만 하더라도 여러 군데다. 어떤 사람은 타워크레인 위에서, 어떤 사람은 송전탑 위에서, 어떤 사람은 굴뚝 위에서, 어떤 사람은 망루를 짓고 그 위에서, 그리고 또 최근의 어떤 이는 가로세로 높이 1m의 철제 구조물에 자신을 가두며 자신들이 부당하게 대접받은 것을 사회에 폭로하고 공정한 법 집행과 공정한 제도 정착을 요구했다. 그렇게 어떤 이들은 몇십 일을, 어떤 이들은 사계절을, 어떤 이들은 몇백 일을 하늘 위 감옥이나 또 다른 형태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었다. 이들이 자신을 감옥에 가둔 날짜는 사용자의 인색함을 넘어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공감 없는 경직성, 잔인성, 폭력성을 그 날짜만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황이 다름 아닌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국가 구성원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어려서부터 교육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를 이윤추구라고 가르쳤다. 많은 이들, 특히 자본가는 이 자본주의의 특징을 종교적 교리인 양 믿고 따른다. 그리고 이윤추구를 위해서 적당한 경쟁은 필요하다고, 아니 경쟁은 필수라고 가르친다. 또한 더 잘살기 위해서는 더 많이 경쟁하며,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폭력적인 이윤추구의 과정도 필수적인 경쟁으로 미화된다.

 

우리나라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불이 넘었다. 국민소득 3만 불이면 대충 계산을 하더라도 4인 가족 기준 연 12천의 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소득 분배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임금을 줄였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부가 편중되었고 빈부격차가 매우 심한 사회이다. 3만 불의 반 정도만이라도 제대로 분배가 되었더라면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서 하늘로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이윤추구이고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인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다. 노동자들은 이 노동의 대가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나름의 미래를 계획한다. 전통적으로 남자들이 노동의 대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행위는 그들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행위였고 자신들의 존재 이유였다. 그런데 더는 노동의 대가로 가정의 생계조차 보장되지 않아 노동자들은 하늘을 오른다.

 

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살기 위한 비인간적인 절규는 모순을 넘어 노동자들의 가정을 위기로 몰아넣는 스캔들(범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용자와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책정할 때,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성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란 가정을 꾸려 적절히 유지하기에 충분하고 가정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보수”(노동하는 인간 19)라는 기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정당한 대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하청구조와 비정규직 제도는 대단히 잘못된 제도이고, 이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무한경쟁에 우리를 노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경험하며 잘 산다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했다. 개인이 더 많은 부를 쌓아가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의 연약한 고리들을 살피고 돌보는 사회적 차원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한 핵심적 요소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노사 간의 갈등에 권위주의 정권이 했듯이 법과 원칙을 앞세우며 노동자들을 통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이 함께 잘 살기 위한 사회적 차원을 고려한 적극적인 중재이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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