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미싱타는 여자들: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쫓아간 사람들

김정대SJ 121.♡.235.108
2022.02.14 15:43 3,08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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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쫓아가세요. 그러면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는 1999년 부제(사제직 전 단계의 성직자) 서품을 앞두고 호주 사막에서 서품 준비 피정을 했다. 이 말은 나에게 피정을 안내해 주었던 수녀님이 해준 말이다. 이후로 나는 나 자신의 원의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직된 사회를 살며 자신의 갈망을 쫓아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독립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출연자들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 갈망을 쫓았던 사람들이다.

 

미싱타는 여자들시다, ‘공순이로 불리며 노동을 하며 살았던 평화시장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 이야기이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후 결성된 노동조합은 노동교실을 운영했다. 이들은 이 노동교실을 통해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 노동교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진학의 꿈을 접고 노동을 하였던 그들이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었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노동교실을 불순하다는 이유를 들어 폐쇄하려고 하였다.

 

이 공안 당국의 노동교실 폐쇄에 맞서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찾고자 197799일 노동교실을 점거했다. 경찰은 그들을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은 불순한 단체행동이라는 누명을 씌워 전원 연행했고, 그중 다수는 억울한 옥살이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외부 불순 세력의 사주를 받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교실을 사수하려 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쫓은 사람들이다. 반면에 그들에게 누가 시켜서 했냐?”는 어이없는 질문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원의를 모르거나 억압하며 사회구조에 순응한 미성숙한 사람들이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원의를 알고 쫓았던 사람으로 매우 성숙한 방식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우리의 신체는 단순히 개인적이지 않은, ‘사회적 몸이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와 경험은 우리의 몸에 그대로 내재(구현) 된다. 억압적인 한국 사회 환경은 그대로 한국인들에게 내재되어 사회적 몸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그래서 한국인들의 사회적 몸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뒷받침해 주는 우리의 문화, 사회, 역사 그리고 제도가 있다.문제는 “‘사회적 몸이 육체가 인식하는 방식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억압적인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한국인의 사회적 몸은 그들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자율을 검열했고 사람들을 억압적인 문화와 제도에 순응하게 했다. 한국 문화는 어떤 면에서 매우 폭력적이고 경직된 면이 있다. 이런 한국 문화의 경직성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를 강요한다. 획일화에 길들여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거나 가치를 따르지 않고 사회규범에 순응하는 삶을 살며 사회의 가치를 따른다.

 

이런 경직된 문화 안에서 악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특별히 더 악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구조적인 악을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여 사람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준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보고서에서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했다.

악의 평범성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누가 억압적인 문화와 제도에 순응하길 거부한다면 그는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는 순응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수치를 주기 위해서 빨갱이’, ‘좌익 용공 세력’, ‘공산주의자와 같은 표현으로 사회적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적 몸이 느끼는 것을 민감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사회의 일부로서 우리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오직 성숙한 사람들이 이 사회적 수치를 극복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출연자들도 이런 사회적 낙인뿐만 아니라 저학력 여성 노동자라는 사회적 멸시로도 사회적 수치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숙하게 소위 사회적 몸이 그들의 육체가 인식하는 것을 제한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느끼는 부당함과 억울함을 명확히 인식했고, 부당함과 억울함을 느끼는 자신들의 몸을 존중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몸을 억압해야 하는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몸을 존중하기 위해서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억압적 문화와 제도의 순응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일방적이기에 자신의 몸을 존중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타인의 몸 또한 존중할 수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권위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미성숙하고 일방적이다. 출연자 중 임미경 씨는 미성년의 나이에 경험한 재판장의 미성숙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판사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나는데, 그런 표정을 봤을 때 그래 이건 저 사람들도 어쩔 수 없나 봐.’ ... 맘대로 자기가 이게 옳구나, 그르구나 결정을 못 내린다는 걸 그때 그 판사의 표정을 보고 알았어요.” 그러나 자신의 몸을 존중하는 사람은 타인의 몸을 존중할 수 있기에 함께 살 수 있는 성숙함이 몸 안에 내재되어 있다.

 

나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인식하고 쫓고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는 기성세대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이렇게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쫓아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도 좀 더 성숙한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 영화를 역사적 관점, 사회적, 그리고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보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도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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