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회사도직, 각본 없는 사도직 (안정호 신부)

정다빈 121.♡.226.2
2025.05.14 10:58 5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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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도직은 각본이 없습니다. 그저 흐름을 읽고, 사회의 필요 속으로 스며들 뿐입니다.”


2025년 4월, 이주노동자센터 ‘이웃살이’가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현재 센터장을 지내고 있는 안정호 신부는 2005년, 예수회 한국관구 사회사도직으로 이웃살이를 시작했던 설립 멤버기도 하다. 안정호 신부는 사회사도직이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파견되는 대로 응답하며, 기꺼이 사람들 곁에 머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난 20년 사도직 여정에는 몸과 마음을 던진 현장의 흔적, 실망과 무력감 그리고 고향을 떠나온 고단한 노동자들의 동반자로서 함께했던 기억이 20년 이웃살이의 역사 속에 차곡히 쌓여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사회사도직과의 첫 만남


안정호 신부의 사도직 여정은 한 마디로 “우연과 요청의 연속”이었다. 수련 시절 폐결핵으로 실습 기회를 놓친 그는 이후 입회 전 주어진 실습 기회에 병원 실습을 원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문제 청소년들을 동반하는 경험을 했지만. 병원 실습을 나가지 못한 아쉬움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실습기(리전시)에 들어가면서 1지망으로 다시 병원을 선택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2지망은 가장 가고 싶지 않았던 곳을 적었다. 너무 ‘내가 원하는 것만 고집하면 안 될 것 같다’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만 가장 원하지 않았던 2지망, 바로 이주노동자 사도직으로 파견되고 말았다.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하는 제 성격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어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 회피형이에요.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을 동반하는 일은 임금을 제때 안주는 사장님들 찾아가서 싸우고, 노동부와 법원의 공무원들이나 경찰한테 항의하고 그런 일이 많죠. 가장 제게는 도전이 되는 곳으로 보내진 거죠.”


우연히 시작된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은 곧 안정호 신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때는 예수회 한국관구가 직접 운영을 맡은 이주노동자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교구와 인천교구의 이주 노동자 상담센터를 오가며 일을 배웠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수녀님과 스태프들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케이스를 직접 맡아 공장에 찾아가 사장과 협상하는 날들을 거쳐 어느덧 “현장에서 뛰는 사도직”에 익숙해져 갔다.



각본 없는 삶, 각본 없는 사도직


그러나 역시 갈등 상황이 힘들었던 그에게 이주노동자 사도직은 금방 번아웃을 가져왔다. 실습기 1년이 지나가자 안정호 신부는 무척 지쳤고, 마음이 삭막해지고 메말라가는 걸 느끼게 되었다. 결국 당시 관구장 신부님을 찾아간 그는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러나 “네가 절대 망가져서는 안 된다. 한 번만 더 해보고 다시 힘들어지면 바로 와라, 그럼 바로 다른 곳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에 다시 자리로 돌아간 그는 묘하게도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남은 실습기 1년도 이주노동자들을 동반하며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실습기 2년을 정리하며 적은 성찰문에는 “힘들었던 만큼 배운 것이 많았던 좋은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나와 맞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은 내내 아프리카 선교를 꿈꿨다. 현지 JRS(Jesuit Refugee Service) 책임자와도 앞으로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나눴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서품 후 관구에서 그에게 바라는 일은 이주노동자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일랜드에서 남은 학업을 마무리할 즈음에, 이번에는 갑자기 관구로부터 중국 천진으로 가라는 단기 파견을 제안받았다. 장기 파견의 가능성도 있었기에 내심 선교사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천진으로 향했다. 그러나 3개월간 그곳 한인 본당을 돌본 후에 그는 관구의 이주노동자 사도직 시작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 삶은 한 번도 예상대로 흘러간 적이 없어요. 늘 뜻밖의 ‘가라’는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에도 안정호 신부는 여러 차례 새로운 곳으로 예상치 못하게 파견되었고 이동과 새로운 시작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 ‘각본 없음’ 속에서 만난 것은 언제나 사람들이다. 


안정호 신부가 이 과정에서 배운 것 역시 이주노동자 사도직의 본질은 ‘사건 해결’이 아닌,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건 해결사가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는 동반자일 뿐입니다.” 체불임금 문제로 함께 싸운 노동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강제 출국당해야 했던 이집트 출신의 노동자, 순진했던 시절 함께 경찰서에 사고 조사로 출석했다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버린 미등록 네팔 청년까지. 때로는 그들을 제대로 돕지 못한 기억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해결되지 않는 사건 앞에서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그 곁에 머물고자 했다. 그의 일은 다름 아닌 동반이었기 때문이다.



시작된 ‘이웃살이’의 여정


이처럼 이주노동자 사도직은 안정호 신부에게 거창한 계획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시작된 소명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무계획이 계획인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각본 없이 ‘이웃살이’는 시작되었다. 2003년, 경기도와 시흥시에서 이주노동자센터 설립을 위한 제안이 들어왔고 예수회 역시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행정 중심의 위탁 운영보다는 보다 작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현장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안정호 신부는 시흥시 ‘작은자리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일을 도우며, 김포 지역 이주노동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감수하며 상담을 받기 위해 먼 곳의 상담소를 찾아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김포 주변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았지만, 상담소 하나 없었고, 연결해 줄 기관도 마땅치 않았다. “김포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있어야 한다고 느꼈고, 저희가 들어가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 사도직을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일을 시작하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책상 하나, 전화기 하나만 두고 작게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양곡 성당 근처에서 사무실을 구하려 했지만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던 차에, 새로 합류한 수사님이 “기왕 하는 거, 판을 좀 키워보자”고 제안해 구래리의 2층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고, ‘이주노동자의 집 이웃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냉장고, 책상, 컴퓨터까지 대부분 기부받거나 물려받은 것이었다. “나중에는 김민회 신부님이 입회 전에 타던 차도 하나 기부받아서 그 차가 ‘이웃살이’의 발이 되었어요. 그 프라이드 진짜 오래 잘 탔죠.” 



삶이 흘러들어온 자리, 우리의 집 ‘이웃살이’


처음에는 단순한 상담 공간으로만 계획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이 하나둘 그곳에 머물기 시작했고, 금세 쉼터로 기능이 확장되었다. “쉼터는 계획에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고, 갈 곳이 없다고 하니 자고 가게 되고 자연스럽게 집이 되더라고요.” 나중에는 주택의 방마다, 거실까지 머물 곳 없는 이주노동자들로 가득 찼고, 주말이면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상을 펴고 한국어 수업을 열었다. 


하지만 김포 신도시 개발 계획이 발표되면서 전세로 머물던 주택을 비워줘야 했고, 안정호 신부는 활동의 중심지였던 인천 검단사거리 인근에서 새 공간을 물색했다. 마침 버려진 인천교구 공소를 무상 임대받아 수리하고, 무료 진료팀 ‘말구유나눔회’와 함께 쉼터와 의료시설을 갖춘 복합적 기능의 공간으로 발전시켰다. 한동안 사무실은 김포 북변동에 따로 마련하여 쉼터와 사무실을 분리해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후 김포 통진에 비어있던 예수회 소유의 2층 단독주택으로 이웃살이가 들어가면서 사무실과 쉼터가 다시 합쳐졌다. 


현장의 요청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사건들도 그만큼 쌓여갔다. 종종 체불임금 문제로 노동부와 법원을 오가고, 공장에 집행관과 함께 압류 딱지를 붙이러 가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사건도 많았고, 끝내 돕지 못한 기억에 가슴이 아픈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곁이 없는 사람들의 곁이 되어주며, 이웃살이는 각본 없는 삶의 무게와 예상할 수 없는 요청에 응답하며 자리 잡아갔다.



제도에 갇히지 않은 사도직, 흐름을 읽는 사도직


어느덧 설립 20주년을 맞은 이웃살이로 다시 돌아온 안 신부는 오늘날 이웃살이의 과제는 ‘복지화’된 구조 속에서도 예언자적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이주 노동자를 향한 지원이 복지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 속에서, 우리는 좀 더 문제를 직시하고 고발하는 색깔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회의 사회사도직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제도 바깥의 목소리를 듣는 감수성이야말로 사회사도직의 핵심이라 그는 믿는다. 각종 행정지원사업, 시청과 연계된 복지 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이주민 관련 기관들이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안에서 ‘인권’과 ‘정의’, 그리고 ‘예언자적 목소리’는 오히려 희미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웃살이가 위치한 김포에도 이주민 관련 단체가 20개 가까이 있지만, 그 가운데 3D 노동 현장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곳은 드물다. 


이웃살이는 다르다. 단지 도움을 주는 ‘센터’가 아니라, 억눌린 이들과 함께 싸우고 머무는 ‘살이’의 현장, 즉 ‘함께 살아가는 집’이라는 철학은 기관의 규모가 커지고, 많은 부분이 필연적으로 제도화된 지금도 유효하다. 따라서 그는 이웃살이의 한국어 교육, 의료 봉사, 법률 상담, 쉼터 등의 서비스가 단순한 기능 제공에 머물지 않고, 인간 존엄성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적 아래 긴밀히 엮일 필요성을 강조한다. “복지 중심의 흐름은 행정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놓쳐선 안 되는 건, 그 구조가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정호 신부는 다시금 한국어반, 의료 봉사팀, 상담, 쉼터가 하나로 엮이는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단순히 지원하는 센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이웃살이를 되살리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함께 살아내는 사도직, 예수회 사회사도직의 길


“예수회의 사회사도직은 어디로 가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 안정호 신부는 잠시 침묵한 뒤,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는 복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복지의 언어가 체계와 행정 속에서 정제되고 고르게 다듬어진다면, 예수회가 마주해야 할 사회사도직의 사명은 훨씬 더 거칠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의 현장, 그 울퉁불퉁한 사회의 피부에 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사회사도직은 하나의 제도나 기관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함께 살아가는 실천의 자리다. 이웃살이가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온 지난 20년의 시간과 상담과 쉼터, 법률 지원, 의료 봉사, 언어 교육까지 이웃살이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활동은 결국 ‘살아내는 동행’이었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여정 속에서 필요한 건, 무엇보다 그치지 않는 질문과 식별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안정호 신부가 강조하는 ‘사회의 흐름을 읽는 능력’은 단순히 시대의 유행을 좇는 게 아니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제도에서 배제된 이들의 언어를 읽고, 그 삶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는 감수성이다. 안정호 신부는 ‘이주노동자지원센터 김포이웃살이’라는 다소 의도가 희석화된 지금의 이름을 다시 바꾸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단순한 쉼터도, 지원기관도 아닌, 흐름을 읽고 사회의 가장자리에 머무르는 예수회 사회사도직의 얼굴을 더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각본 없는 길 위에서 계속될 하느님의 부르심과 사람들의 요청에, 이웃살이와 안정호 신부는 오늘도 조용히 응답하며, 함께 살아내는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인터뷰 및 정리: 정다빈 멜라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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