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난민] 존재를 증명할 수 없던 이들의 마지막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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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초, 도쿄 서부의 한 병원에서 한 통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해진 소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령의 한국 국적 부부가 다카오산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구조돼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 중이지만, 퇴원 후 마땅한 거처가 없습니다. 두 분은 한국으로의 귀국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체온 저하와 약물 중독 상태에서 구조된 이 부부는, 삶을 포기하려다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병원에서 더는 머물 수 없다고 했고, 귀국을 알아보는 동안 머물 수 있는 임시 주거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우선 도쿄 베타니아 수녀회에 연락해 보호를 요청했고, 수녀님들은 두 분을 기꺼이 ‘3주에서 한 달’ 머물 수 있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했던 두 사람과 조용히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법이 증명하지 않는 삶
윤광현 씨(가명)는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2세까지 도쿄에서 자랐습니다. 이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해 서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20대 중반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체류 자격 없는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만큼 일본어는 유창했지만, 그에게는 여권도, 외국인등록증도, 어떠한 법적 서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내 강금이 씨(가명)는 한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다 관광비자로 일본을 방문했고, 윤 씨를 만나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비자 갱신 없이 일본에 체류하며 25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지만, 삶을 함께 감당해온 한 몸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윤 씨의 삶을 따라가며 잊힌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도쿄의 조선학교에 입학했던 일,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탕공장, 초등학교 졸업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사연을 들었습니다. 가족 사업이 실패한 뒤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남의 이름을 빌려 일하고, 계좌를 만들고, 병원에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야마모토’라는 가명으로 운전면허를 만들고, 그 명의로 통장을 개설하며 타인의 신분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강 씨 역시 처음엔 관광비자로, 그다음에는 어학연수생 자격으로 일본에 체류했지만, 이내 신분이 불안정해졌고, 식당에서 일하며 불법 체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암 진단 이후 친구의 건강보험증을 빌려 수술을 받았고,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며 힘겹게 살아왔지만, 지금은 그 가족에게조차 더는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의 삶은 불법이라 불리지만, 법이 품지 못한 삶의 무게와 고단함,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들로 이어진 시간이었습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
처음 귀국을 알아보던 때, 들려온 설명은 간단했습니다. “입국관리국에 자진 신고하면 3주 안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강금이 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윤광현 씨에게 귀국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모든 법적 신분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자신이 누구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는 1950년대 가족과 함께 처음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개명했고, 그 당시 본적을 제주에서 서울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후 수십 년이 흐르면서 가족과의 연락도 끊겼고, 자신의 본적지 주소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습니다. 한국 영사관, 변호사, 지원 단체 등 수많은 곳에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윤광현 씨는 분명 우리 앞에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을 내미는 이들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회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에 있는 이주사목 관계자들과 연결되었고, 의정부교구의 이주사목위원회를 통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윤 씨의 부친과 형의 제적등본(이미 폐기된 가족관계등록부)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윤 씨는 인쇄된 A4 용지의 그 문서를 밤새도록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가족의 이름들, 잊힌 줄 알았던 과거의 주소들이 거기 또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시간 속의 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그러나 귀국을 위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윤 씨는 심각한 시력 저하로 이동조차 어려운 상태였고, 그동안 그의 눈이 되어준 강 씨 또한 백내장이 심하게 진행돼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상황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고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적어도 한 사람의 시력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여러 병원에 문의했고, 도쿄의 한 병원이 이 상황을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의료’로 판단해 강 씨에게 무료 백내장 수술을 제공해주기로 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시력은 양쪽 모두 0.8 이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침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되찾았습니다.
다시, 삶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2024년 12월 4일, 윤광현 씨는 58년 만에, 강금이 씨는 25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두 사람을 맞이하는 공항에는 나카이 준 신부님과 두 분의 보금자리가 될 요양원을 연결해준 수녀님이 나와 계셨습니다. 그 수녀님은 원래 11월 중순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뜻밖의 일정 변경으로 한국에 더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일을 위해 제가 여기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 누군가 우리 삶에 조용히 개입하고 계셨다는 듯한 고백처럼 들렸습니다.
그날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오래도록 남을 장면이었습니다. 때로 기적은, 삶이 틀어졌다고 여겼던 순간에 조용히 다가옵니다. 귀국을 준비하며 함께한 지난 8개월 동안, 두 분은 수없이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 거죠?” 그 질문은 단지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동반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처럼 들렸습니다. 신분증이 없고,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로부터는 머물 자리가 없는 사람들의 이름 없는 삶 역시 존엄 가운데 계속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아닐까요?
무사히 한국에 돌아온 두 분은 지금은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계십니다. 따뜻한 식사와 햇볕 좋은 방 그리고 말벗이 있는 날들 속에서 두 분은 이제는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삶이 다시 시작될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신 모든 분들과 이 모든 만남을 인도하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오사코 카즈에 (CTIC, 가톨릭 도쿄 국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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