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사회] ‘회복과 성장’, 분배와 한계

조현철SJ 121.♡.226.2
2025.03.06 13:47 1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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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는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화두는 회복과 성장이다. 지난 10일 국회 연설에서는 공정 성장잘사니즘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성장의 기회와 결과를 함께 나누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기본 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를 설치한다고도 했다. 성장을 둘러싼 우클릭 비판에 분배를 더해 응답한 셈이다.

 

성장해야 분배할 수 있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성장한다고 분배가 그냥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껏 성장에 목매지 않은 정권은 없었다.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정언명령이다. 정부와 기업은 늘 구조적인 성장 압력을 받는다. 은행 이자를 갚고 투자자 수익을 보장하려면 기업은 매년 더 많은 이윤을 내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으로 고용 수요가 줄어 실업자가 느는 것을 막으려면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힘써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문제는 성장 후 분배다. 성장의 결실이 필요한 곳으로 돌아갈까? 역사는 저절로 그렇지 되지는 않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장이 세상을 더 정의롭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효과이론이 전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복음의 기쁨>). 물이 잔에 계속 떨어지는데도 넘치지 않는다면 그건 누군가 물을 마셔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현실에서 입증되지 않는 이론은 틀린 것이다.

 

성장이 분배로 이어진 적이 있기는 하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서구는 성장의 결실을 사회기반시설 확충과 좋은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서 큰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것은 저절로 된 게 아니라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필두로 한 진보적 시대의 결과였다. 이후 성장의 과실을 독식하려는 자본의 요구가 득세하며 성장에서 분배 효과는 사라졌다. 20세기 중반 다수의 신생 독립국 정부도 처음에는 성장의 결과를 노동자 임금 개선, 보건과 교육 등 공공 영역에 돌리며 효과를 봤다. 하지만 계속해서 남반구의 노동력과 자원을 저렴하게 유지하길 원하는 서구의 개입으로 상황이 변했다. 성장과 함께 실업과 빈곤과 불평등이 늘어났다. 토마 피케티가 지적하듯이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다. ‘중도보수로 정치적 입지를 설정하려는 이재명에게 성장을 분배로 가져갈 정치적 의지가 있을까? 말이야 그렇다고 하겠지만 금융투자 소득세나 가상자산 과세에 관한 그간의 정책 행보를 보면 의구심이 든다. 정치인은 말이 아니라 정책으로 말한다.

 

유한한 지구에서 성장은 유한하다. 우리 몸도 어느 정도까지만 자란다. 그 후에는 성장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한계를 넘는 몸의 성장은 병이다. 한계가 있는 게 정상이다. 성장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 증대를 뜻하고 한 나라의 성장은 국내총생산(GDP)의 증가로 나타난다. 성장은 우리가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끌어내어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버린다는 뜻이다. 지구는 점점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변해간다. 자연의 복원력도 한계가 있다. 현재 추세라면 성장은 자원 고갈 전에 생태적 한계에 먼저 부딪힐 거다.

 

이제 우리는 생태적 한계를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온 기후재난으로 체감한다. 아직 추위가 한창인 겨울에 문득 다가올 여름을 걱정한다. 택배 노동자에게 여름은 목숨 걸고 일하는 때가 되었다. 폭염, 가뭄, 폭우가 심해지고 잦아질 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로 수분 증발량이 많아져 가뭄에서 홍수, 홍수에서 가뭄으로 급변하는 사례가 늘었다. 바다와 하늘의 기상 급변으로 해상과 항공 사고도 늘어난다. 현실이 이런데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제1당 대표가 성장의 생태적 한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생태적 한계를 넘으면 잘 살 수 없다.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성장하면 잘 사는 건가? 성장하면 모두가 잘 살게 되나? 광장을 빛으로 물들인 시민들이 갈망하던 우리가 다시 만날 세상GDP 증가로 도래하는 세상인가? 최근 보도를 보니 한국전력공사는 전북 서남권과 전남 신안의 해상 풍력으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려고 전북 정읍에서 충남 계룡을 연결하는 176.6km 구간에 송전탑 380개를 세우는 사업 계획을 추진하다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은 정읍, 임실, 김제, 완주, 진안, 금산, 논산, 계룡, 대전이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탑을 세우면 GDP가 늘어난다. 성장한다. 이 성장으로 수도권은 조금 더 잘 사는 세상이 될지 모르지만, 송전탑 지역주민은 그 세상에서 배제된다. 이런 식으로 만드는 잘 사는 세상이 커질수록 배제되는 사람도 늘어난다. 남태령에서 전봉준투쟁단 농민과 함께 겨울밤을 지새운 시민들이 이런 잘 사는 세상을 바랬을까? 그래서 다시 묻는다. 잘 사는 건 무엇인가? 광장의 시민 덕에 정권 도전의 기회를 얻은 정치인이라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2009스톡홀름 복원력 센터(the Stockholm Resilience Center)’의 요한 록스트룀이 이끄는 지구 시스템 과학자 집단은 지구 시스템의 온전한 유지에 필요한 아홉 가지 지표를 제시하고 그 위험 한계선을 추산했다. 이 지표는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 손실, 해양 산성화, 오존층 파괴, 대기오염(미세먼지), 담수 고갈, 질소·인 축적, 토지 이용 변화(산림파괴), 새로운 화학물질(미세플라스틱 등)로 인한 오염인데 모두 성장과 관련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경제학>에서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공간을 제시한다. 이것은 물, 식량, 소득과 일자리, 보건, 교육, 주거, 에너지 등 열두 가지 사회적 기초를 보장하되 앞의 아홉 가지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는 공간이다. 좋은 삶은 이 공간에 머물 때 가능하다.

 

오늘도 사회적 기초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기초를 누려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생태적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태적 붕괴가 일어나면 사회적 기초도 붕괴하기 때문이다. 이미 위험 한계선을 넘은 지표들이 있다. 생태적 붕괴는 이미 시작됐다. 자본은 생태적 붕괴가 초래하는 재난을 또 다른 성장의 기회로 삼으려 하겠지만, 잘 사는 삶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잘 사는 삶은 지금 사회적 기초를 초과해서 누리는 부유한 사람들의 양보로만 가능하다.

 

잘 산다는 것은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고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사회 정의와 생태적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을 뜻한다. 우리가 광장에서 갈망한 것도 이런 세상이 아닌가. 이제는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만 바꿔서는 효과가 없다. 성장이라는 판을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도 경제도 바꿔야 한다. 우리 생각도 바꿔야 한다. 어렵지만 그것만이 진정 모두가 잘 사는 세상,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로 갈 때 우리가 찾아야 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조현철 신부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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