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죄의 연대에 대한 하느님의 외침

김정대SJ 118.♡.21.101
2024.07.09 12:58 435 0

본문

  

단락 텍스트의 사본 (6).png

 

나는 1990년에 예수회에 입회해서 양성기(사제직을 준비하는 10여 년의 시간)를 보냈는데 예수회 문헌을 포함해서 교회 문헌은 가난을 무척 강조하였다.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자본주의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인간적이었다. 수도자로서 나의 삶은 풍요롭지 않았지만 궁핍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부자였다.

 

나는 한때 마포 공덕동에 있는 주택가의 어느 한옥에서 수사님 5명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따로 분리된 한 칸짜리 화장실과 한 칸짜리 욕실을 같이 사용했다. 함께 살던 정일우 신부님은 우리 집은 적당히 불편합니다라고 하셨다. 불편하기에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또 남들이 하는 아쉬운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삶이 서로를 성장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의 편리를 봐주며 사회성(공동체성)을 온몸으로 익혀야 했다. 인간은 이런 사회적 존재로 상호 관계 안에서 조금씩 각자의 이기적인 모습이 깨지며 성장한다.

 

한편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불의한 구조와 위계적인 구조는 일방적이어서 사람들을 상호 관계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인간관계에 기반한 다수의 불의한 구조와 위계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나는 그중에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이 구조는 자본을 우상화한다. 이 구조는 자본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다른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무시한다. 이 신자유주의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신자유주의 이념을 떠받쳐야 한다. 그래서 인간을 자본에 종속시킨다. 이는 권위주의의 한 형태로 곧 폭력이다.

 

이런 불의한 구조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는 예는 많이 있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바로 이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화성에 있는 리튬전지를 생산하는 아리셀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23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8명의 노동자가 심한 부상을 당했다. 리튬전지는 사용하기는 매우 편리하지만, 리튬은 폭발 위험성이 매우 높기에 제작 과정에서 각별한 주의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화재로 회사가 안전교육을 소홀히 하고, 시설 설비에 있어 안전장치를 무시해 온 것이 문제였음이 드러났다. 이 화재는 불가항력으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

 

아리셀에서 발생한 이 중대재해는 우리 사회에 깔린 폭력적이고 불의한 위계 구조를 보여준다. 자본의 이윤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가치는 무시되었다. 인간을 위계적으로 줄을 세운 구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하부를 지탱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런데 이번 화재로 인한 산업재해의 사망자와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중국 출신 동포로 이주노동자들이다. 즉 김용균 청년 노동자의 처참한 산업재해를 통해서 드러난 위험의 외주화는 하나도 개선되지 않고 이제 위험의 이주화로 전이되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불의한 위계 구조를 떠받치는 그 자리에 이제는 이주노동자들이 배치되어 착취당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은 자본의 이익을 위한 총알받이이다.

 

이런 위계적 구조에는 경직성이 있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며 일방적이다. 하청 업체의 사업주들은 불이익을 당할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알아서 자본의 요구에 순응한다. 그래서 불법파견도 마다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채워 넣는다. 악은 이렇게 연대한다. 이렇게 불의한 사회구조에서 죄도 연대성을 지닌 파괴의 힘으로 존재한다.

 

죄의 연대로 인한 폭력은 단지 사용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이 경직된 구조, 불의한 구조, 위계적인 구조에 침묵할 때 이 구조는 더욱더 견고하게 우리의 삶의 영역을 죄로 물들인다. 사실 권위주의는 침묵하는 피해자들에 의해서 더욱더 견고하게 강화된다. 침묵하는 피해자들은 한편으로 권위주의의 조력자란 의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죄의 연대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외침에 귀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불법 노동착취를 당하는 이들 안에서, 네가 날마다 죽이고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느냐? 아무 일도 없는 척하지 맙시다. 생각보다 더 많은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는 모든 이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도시에는 이 악명 높은 범죄망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편의로 침묵의 공모를 하여 이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211)

 

우리의 편리한 삶을 위해서 누군가 과로사로 혹은 중대재해로 죽임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가해자에게 그리고 이 사회의 피해 당사자를 위해서, 그의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또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위해서 저항해야 하지 않는가?

 

 

김정대 신부 (예수회)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