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호국보훈의 달에 꿈꾸는 화해

까밀로 118.♡.21.101
2024.06.05 18:57 7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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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식상하지만, 그래서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를 6월 호국보훈의 달이다.

 

1년 중 애국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때다. 6월엔 현충일에 한국전쟁 개전 일까지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달이다. (6월은 프라이드 먼스인데!!)

 

나는, 고백하자면 한국 가톨릭교회의 세 번째 병역거부자다. 물론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지 않고 병역을 거부했던 이들은 더욱 많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승의 날로 보내는 5월 15일은 WRI(War Resister’s International)이 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이다. 세계 도처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전쟁과 국제 분쟁에 대항해 평화를 이야기했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병역거부자를 기억하자고 정한 날이다.

 

고동주 씨가 한국 천주교 신자로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2007년 한국 가톨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남장협)는 전국의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수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병역거부권과 평화권에 대해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 설문조사의 결과는 역시나 무척이나 아쉬운 이해 수준을 보여줬다. 그들 개개인을 탓할 생각은 없다.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히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한계이고, 신학 교육시스템의 한계일 것이니. 이제는 그들 대부분이 일선 사목 현장에서 사목활동을 펼치고 있을 터,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는 사목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흔히들 가톨릭교회는 "느리다"고들 한다. 이해한다. 너무나 복잡하며 다양한 이들을 품고 아우르는 공동체가 또한 교회일 것이니. 하지만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분명 교회의 변화를 아주 조금씩 감지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한편으로 여전히 조급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것 또한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병역거부의 과정은 끊임없이 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관심 없는 이들에게 말을 거는 작업이었다. 이는 또한 다양한 영역의 소수자 운동, 당사자 운동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로 고백하자면, 나는 가톨릭교회 안에 살아가는 성소수자다. 나는 논 바이너리-트랜스젠더 퀴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달은 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부러 더욱 적극적으로 커밍아웃해왔다. 교회 안의 소수자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를 내왔다. 그것이 나의 운동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도 퀴어 커뮤니티들이 존재해 왔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유럽(특히 독일)이나 미국 교회들의 움직임도 주의 깊게 지켜봐 왔다. 프란치스코 교종 또한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으로나마 성소수자 커플의 사목적 축복을 허용하는 등 이전과 다른 길을 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한국 교회의 호응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교황청이 성소수자 커플의 축복을 허락한 후 서울주보에 실린 생명위원회 소속 어느 사제의 글은 여러 성소수자 친구들을 크게 낙담하게 했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지 적절한 말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커밍아웃하며 스스로를 드러내려 노력하는 이유다.

 

시노달리타스를 위한 시노드 여정 가운데 서울대교구 사제와 교회 내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함께하는 경청 모임이 있었다. 당시 참석했던 사제는 "교구장님에게서 우선 잘 듣고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누군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것에 감격하며 고마워했고, 또 누군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하며 비판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게토화되어 버린 한국 가톨릭 성소수자 공동체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손을 내민 첫 경험이었다는 것에 지지를 보낸다. 다만 교구의 시노드 종합 문서에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담기지 못했다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부디 교회가 먼저 내민 손길을 교회가 스스로 거두지 않기를 바란다.

 

시노드에 앞서 몇 해 전 주교회의는 한국 청소년 사목 지침서를 발간했다. 2021년에 발행되었는데도 아직 현장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현시대의 관점에서 청소년과 청년 세대들을 이해하고자 애쓰며, 교회가 손 내밀지 못한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한 번쯤 일독을 권하고 싶다. 물론 지침서가 보여주는 이해도 아직은 미약하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지침서가 나오기까지도 참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을 것을 안다. 주교회의가 발간한 한국교회의 공식적인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사목 지침서로써, 이 지침서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교회를 위해 하나의 전망을 두고 서로를 이해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어째서 먼저 내 존재에 대해 이해시켜야만 저들과 만남도 대화도 가능해지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이 쌓여갈수록 화해를 실천하는 것은 내게는 온 존재를 담아 투신해야 할 과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화해(reconciliation)란 끊임없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뜻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맺어진 관계는 결코 만남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화해를 위해서는 우선 만나야 한다. 만나기까지가 참으로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나고, 그렇게 만나 서로의 존재에게 말을 건넬 때 비로소 다시금 새로운 관계 맺음이 시작된다.

 

최근 얼마간 교계 언론들은 주교들의 사목 체험 방문 소식을 연이어 보도했다. 나름의 노력이라 여겨 응원을 전한다. 하지만 사목 체험이라니, 누군가의 삶은 잠깐의 방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체험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돌보지 못했던 이들,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프란치스코 교종이 강력히 촉구했던 야전 병원으로서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Camilo Torres (인권활동가)

 

 

        

글 서두의 이미지는 최병수 작가의 그림 <너의 몸이 꽃이 되어>를 임종진 작가가 촬영한 사진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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