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어두운 현실에 대한 글을 쓰는 천주쟁이를 위한 변명

김정대SJ 118.♡.21.101
2024.03.04 18:07 1,5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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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글은 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에 관한 내용이다. 내 글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달라 불편해서 나의 글을 피한다. 심한 경우, 불쾌감으로 나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전하는 현실에 공감하여 이 사회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런 무거움이 나의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까지 해준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마술사 정도로 여기며 무언가 비현실적인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를 마술 도시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현실을 올바로 보는 혜안을 갖는다. 즉 신앙은 우리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의미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나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사악함이 만들어내는 어두움을 보고 어떻게 그 사악함을 극복해야 하는지에 고민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요즘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사순절이란 재의 수요일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도록 준비하는 40일간의 시간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나약한 인간으로서 지은 죄를 참회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자선과 희생을 실천한다.

 

한 사람의 천주쟁이로서, 수도자로서, 그리고 사제로서 내가 세속화된 이 사회에서 나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통해서 나의 신앙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인간 삶의 가치는 우리의 사회 이념의 중심에서 제외될 수 없는 가치이다. 신앙은 이런 가치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내가 인간 존엄의 가치와 같은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감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나의 신앙과 나의 하느님과의 관계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서 내가 타인을 비롯하여 하느님의 피조물과 맺고 있는 관계의 질이 하느님과의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줌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피조물을 돌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의 타인과 그리고 하느님의 피조물과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떠한가? 무한 경쟁의 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 삶의 가치, 인간 존엄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의 이익만이 중요한 가치이고 관심거리다. 인간도 이 자본의 탐욕에 종속되어 착취와 폭력의 희생물이 된다. 그리고 착취와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은 불안정한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의 꿈도, 사랑도 다 유보하고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불안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야 한다.

 

단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고, 청년들이 그렇다. 이들은 버려진 존재들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이들의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가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이를 증언한다. 이렇게 사회의 비전과 응집력이 상실되면 그 사회의 삶에 대한 지배력이 사라진다. 우리 사회의 자살률이 이런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출생률이 말해주고 있듯이 이 사회의 존재와 성장 가능성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의 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가톨릭교회는 매일의 전례 안에 성경의 다양한 구절들을 제공한다. 사순절을 보내는 요즘, 나의 마음에 깊이 울림이 있는 한 구절이 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복음 6,38) 이 말은 우리가 맺는 관계는 상호적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상호성이란 선의의 교환 그리고 친밀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호 관계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변하여 공감하는 관계이다.

 

우리가 맺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상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향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다. 다만 관계의 상호성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향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돌아온 탕자’(루카복음 15,11-32)로 소개된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너무도 명백하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타인을 향하여 가졌던 우리의 태도와 삶의 기준을 타인도 우리를 대할 때 사용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대할 때 우리의 태도와 삶의 기준으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함께 사는 인간에게 착취와 폭력을 일삼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사람들에게 그들 삶의 기준으로 되돌려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득권자들과 고통에 처한 사람들의 상황을 반전(역전) 시켜 주실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분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복음 1,52-53)

 

우리의 현실은 어둡다. 희망은 있다. 하느님께서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 자들과 그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역전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거저 오지 않는다. 희망은 의무를 동반한다. 이런 희망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함께 연대하여 상황이 반전되도록 잘못된 구조에 저항해야 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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