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늘날에도 유효할까?

김민SJ 121.♡.235.108
2023.10.16 15:13 1,5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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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3일 화요일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에서 주관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는 뜻밖에도 굉장히 시대착오적인인물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사실 인권연대에서 주로 사회 이슈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것을 감안한다면 좀 의외의 인물을 주제로 삼는 셈이다. 진실을 말하면, 아마도 인권연대 연구센터 소장 신부님이 서강대의 교수 신부님을 만나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열릴 일이 없었을 세미나였다. , 세상 일이라는 것이 항상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이해함직하다.

 

세미나에서 발표를 한 이는 게르하르트 베스터묄러(Gerhard Beestermöller) 교수로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던, 하지만 퇴직 후 룩셈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디벌리스트(중세학자)이다. 베스터묄러는 토마스 전공자인데, 이 말인즉슨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냥 중세 덕후 혹은 토마스 덕후는 아닌 듯 보이는 것이 그가 쓰거나 함께 편집한 다섯 권의 책들 가운데는 전쟁 윤리의 관점에서 이라크 전쟁을 바라본 책도 있다.

 

아무튼 토마스 아퀴나스와 인권연대라는 굉장히 만나기 힘든 두 단어의 만남의 한 가운데에는 그나마 . 이 정도면...’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주제가 있다. 바로 정당한 전쟁이론이 그것이다. 가톨릭 교회교리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정당한 전쟁론(혹은 정의로운 전쟁론)은 그 역사가 아우구스티노 성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 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당한 전쟁론 역시 아우구스티노의 전쟁론을 준용하고 있다. 그러면 베스터묄러 교수는 한국의 청중들에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당한 전쟁론을 어떻게 풀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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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요약과 조금 복잡한 설명

 

서양 고전시대나 중세시대의 사상을 전공하는 이들은 대개 그쪽 분야의 덕후이기가 쉽다. 사실 덕후가 아니면 누가 그리스어나 고전 라틴어 혹은 족보도 이상한 중세 라틴어라는 어마무시한 장애물을 뚫고 아우구스티노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이 한참 만주벌판 말을 달리고 있거나 삼별초가 열심히 완도에서 농성 준비를 하던 시기의 인물들을 공부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이런 덕후들은 대체 네가 공부하는 그 인물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마치 반칙당한 프로레슬러처럼 눈을 찌푸리기가 십상이다. 과연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이 근원적인 질문을 다루기 전에 베스터묄러 교수의 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베스터묄러 교수의 강의는 질의응답을 제외하면 대략 세 가지 파트로 나눠진다.

 


첫 번째 파트: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주류 해석에 대한 비판

 

베스터묄러에 따르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당한 전쟁론을 가장 많이 따르는 이들은 영미 쪽의 학자들, 특히 윤리신학 쪽의 학자들이라고 한다.-유럽이나 영미에서 한 번도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믿기로 했다.- 유럽 출신답게-게르하르트라는 이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독일인이다. 하지만 베스터묄러라는 이름은 좀 독일인 같지는 않지만 남 족보에 대해서 신경 끄기로 하자.- 처음부터 영미 쪽의 토마스 아퀴나스 해석이 어쭙잖다는 신선한 도발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 근거로 대는 것이 영미 쪽의 주류 해석은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을 맥락 없이현실 질서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제시되었는데,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에 관한 나토의 군사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토마스의 이론이 사용된 경우이다.

 

이 경우 주권국가 개념이 없었던 중세의 인물인 토마스에게는 너무나 억울하게도 맥락이 전혀 다른 오늘날의 국제 질서에 정당한 전쟁론을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베스터묄러는 (내가 느끼기기에는 꽤 의기양양하게) 우리가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해석: 영미 학자들이 제대로 토마스를 이해하려면) 신학대전 내의 항목뿐만 아니라 시대적 맥락과 신학대전을 넘어선 토마스의 전체 사유의 맥락 안에서 정당한 전쟁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그 자리에 미국 출신 토미스트가 있었으면 억울해서 피를 토할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한 후 그는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간다.

 


두 번째 파트: 토마스의 전체 사유에서의 전쟁의 위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전쟁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먼저 평화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전쟁이 뜻하는 바와 토마스에게 전쟁이 의미하는 바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기에 그렇다. 토마스에게 평화는 전쟁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즉 평화는 나 자신과 타인이 죄로부터 구원되는 것이다. 토마스에게 전쟁은 뜻밖에도 이러한 평화의 수단, 즉 죄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될 때에 비로소 정의로운 전쟁이 될 수 있다. 베스터묄러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전쟁과 평화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개념으로 토마스의 사유체계의 맥락 속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오류 정정 혹은 해석학적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베스터묄러는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은 사실 인간의 구원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하여 정당한 전쟁은 신학대전 중에서 사랑의 항목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파트: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의 전제들

 

당연하게도 베스터묄러는 논의를 매우 정석적인 내용으로 이끌어갔다. 그토록 베스터묄러가 비판해 마지않았던 영미 쪽의 기계적인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의 적용의 요체가 나오는 셈이다. 이 부분은 아주 간단히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토마스는 정당한 전쟁의 성립 전제를 세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는 전쟁 선포의 권위의 문제. 즉 전쟁은 사적 개인이 함부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권위 혹은 그 권위의 대리인이 행하는 공적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쟁 선포의 원인. 만약 전쟁이 피에 대한 갈망이나 물욕이 아니라 자기방어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면 정당한 전쟁이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전제조건이다. 마지막 전제는 의도 역시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도가 선해야 정당한 전쟁이 된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의도가 있어야 하며, 만약 자기방어라는 명분과 원인이 있더라도 그 꿍꿍이(의도)가 영토의 확장 따위에 있다면 이는 정당한 전쟁이 될 수 없다.

 

베스터묄러는 자신의 해석학적 원칙대로 신학대전의 전체 맥락과 <대이교도대전>이나 <마태복음 주해>와 같은 다른 토마스의 저서들에서 드러나는 토마스의 전체 사유의 틀, 그리고 토마스 시대의 주요 전쟁들을 일람하면서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의 참된 뜻을 설명하고자 했다.

 

 

토마스는 여전히 유효한가?, 베스터묄러의 야망과 좌절

 

그 자리에 있었던 청중들은 대략 10여 명 정도로 상당수는 평화학의 관심에서 온 듯한 이들이었다. 사실 이 세미나를 준비했을 때부터 우려했던 바이지만 많은 참가자들이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토마스에 대한 베스터묄러 교수의 열정 역시 이들의 공감을 사는데 역부족이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토마스에 대한 베스터묄러의 설명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베스터묄러도 강조했지만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은 전쟁에 대한 신학적 이론화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구체적인 행위와 대상인 죄로부터의 구원의 부차적 주제이다. 즉 토마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전쟁의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필요악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공동선을 지키고 자신과 타인의 영혼이 죄에 빠지는 것을 막을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다.여기에서 베스터묄러의 야망-오늘날에도 여전히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온다.

 

토마스가 염두에 둔 전쟁론은 그리스도교 가치와 윤리를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마키아벨리 이후 오늘날까지 프랑스인들이 레종 데타(raison d'etat)라고 부르는 국익이 그리스도교 윤리를 초월해버렸다. 전쟁 역시 마키아벨리 이후 국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되며 클라우제비츠 이후로는 정치의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토마스의 전쟁 개념 자체가 오늘날에는 잘해야 사고실험이고 심하게 말하면 저세상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니 토마스와 103일 서울의 예수회 센터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10여 명의 한국인 청중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인식과 관념의 차이가 존재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베스터묄러가 설명한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은 꽤 의미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가치와 윤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국익의 최고의 정점에 이른 이 세상의 질서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인식,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성, 윤리의 부재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가치관이 틀어져 버렸다는 비통한 현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 것. 베스터묄러 입장에서는 많이 실망스럽겠지만, 그래도 토마스의 정당한 전쟁론이 우리에게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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