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생태적 회심에서 새로운 길로
조현철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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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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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생태적 회심은 우리에게 “소비 지향적 생활양식”과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고 촉구한다(LS 204, 205항). 이 새로운 길은 기존의 자본주의 성장 체제의 전환을 가리키지만, 당장 자본주의 성장 체제와 결별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기존 체제에서 두 발을 다 뺄 수 없다면, 새로운 길은 한 발이라도 빼려는 노력에서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길을 여는 근본적인 힘은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해온 정부와 기업이 아니라 개인과 시민사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인과 시민사회는 정부와 기업이 새로운 길로 나가도록 이끄는 힘이다. 기후 문제에 개인의 대응은 매우 중요하다. 다수의 개인이 무관심한데 정부나 기업의의 관심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 각자가 소비주의에 의식적으로 맞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택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의식주와 관련된 상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쓰고 나면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원료 확보에서 생산과 유통과 소비와 폐기까지 상품의 전체 주기를 알면, 생산에 투입된 노동과 에너지의 성격, 이동 거리, 지역 생산의 가능성 등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상품은 단순히 돈으로 사서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이 되며, 그럴 때 우리는 맹목적 소비주의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
기후 대응에 정부의 역할은 대단히 크지만, 정치권력이 자본주의 체제와 역사적으로 유착 관계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연과 사람 등을 지배하고 변형하는 현대 국가의 정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48). 자본주의 체제는 처음부터 국가 권력의 보호 속에서 성립되고 유지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정부는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기후위기에 신속하고 과감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성장에 손을 대기보다 성장을 쫓는 기업의 요구에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정부는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 기존의 길을 따라 기후위기를 가속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시민사회가 기후를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다루고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야만 정부는 새로운 길을 고민할 것이다. 유럽연합이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우리 정부가 그나마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부족한 대로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세운 것도 그동안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매년 9월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기후집회’의 의의와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체제 전환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이다. 화석 에너지를 재생 가능 에너지로 바꾸는 에너지 전환은 그러나 단순한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가 달린 사회적 차원의 의제다. 따라서 이 전환은 무엇보다 ‘정의로운 전환’이어야 한다.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에너지를 비롯한 사회 체제 전반의 전환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탄소중립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을 중심에 놓는 일이다. 수치가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출 때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거대한 체제 전환이 사회적 약자의 일방적 희생을 막고 책임의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온실가스 감축에서 기업의 책임이 막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기업은 이윤을 위해 성장을 쫓도록 타고났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환경 보호 정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구의 온도 상승을 1.5도 이하로 유지하려면 공급망, 에너지 사용, 물품 조달, 심지어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메리 로빈슨 <기후정의> 210) 정부는 기업이 ‘기후 책임’을 다하도록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여 기업을 지원하되 철저하게 감독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으로 발생하는 실업 요인의 증가가 성장을 압박한다면, 노동시간 감축은 이 압박을 해소하여 온실가스를 줄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노동시간은 생산, 곧 자원의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량과 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1930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생산성 향상으로 100년 후에는 주당 노동시간이 15시간이면 충분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자본은 생산성이 올라갈 때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자 수를 줄였다. 고용 감축이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세금과 보험 제도 등 관련 제도를 정비하여 기업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원 사용에 세금을 매기는 체제로 방향을 전환”하면 “적은 인원으로 상품을 더 많이 만드는 쪽에서 사람은 더 많이 고용하고 물건을 수리하거나 되살려 자원을 덜 쓰는 쪽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것이다.” (케이트 레이워스 <도넛 경제학> 318)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노동 수입도 줄어드는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대책으로 코로나19 때 유행처럼 급속하게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기본소득’이 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일정액을 직접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사람들을 당장의 생존 위협에서 얼마간 벗어나게 하여 성장으로 치닫는 자본의 움직임에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비롯한 많은 제품은 일정 기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고장이 나도록 만든다. 이른바 ‘계획적/기술적 진부화’다. 스마트폰의 경우, 배터리를 교체할 수 없게 일체식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어 배터리가 고장 나면 새로운 기기를 사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물건을 더 팔아서 이윤을 더 올리려는 전략으로 성장을 촉진하고 소비주의를 강화한다. 최근 유럽의회가 스마트폰에 탈부착 배터리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처럼, 기업이 사용자에게 ‘수리할 권리’를 돌려주도록 만들어야 한다.
돌봄 노동은 ‘좋은 삶(buen vivir)’에 매우 중요하다. 돌봄이라는 재생산 노동이 없다면 생산 노동도 없다. 더구나 전 세계적으로 고령 사회로 들어서는 현실에서 돌봄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돌봄 경제는 언제나 생산 경제의 뒷전에 머물러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요구하는 돌봄 경제는 생산 경제보다 시간이 많이 들어서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돌봄 경제는 좋은 삶에 필수일 뿐 아니라 생산 경제보다 온실가스를 훨씬 적게 배출한다. 정부가 돌봄 경제의 가치를 인정하고 돌봄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부여하면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물리적인 성장의 부담 없이도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과 식량은 생존 문제다. 기후위기가 심해지면 물과 에너지의 확보가 힘들어지면서 현재의 산업농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태농에 종사하는 ‘소농’의 활성화가 중요하다. 기후위기 시대에 소농은 “희생자인 동시에 구원자”가 된다. 소농은 “가난하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충격에 더 취약하다. 그럼에도 소규모 농장 자체는 생태적으로 재해에 덜 취약하다.” “지속 가능한 유기농업으로 현재의 CO₂ 배출량의 40%를 제거할 수 있다.” (라즈 파텔, <경제학의 배신> 252)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농업 부문의 비중을 대략 20%로 보면, 생태농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상당하다. 더구나 생태농은 산업농보다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한다. 생태농에 의한 생산물은 지역 소비 중심이므로 원거리 교역보다 에너지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다. 기후위기 대응에 놓쳐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소농과 생태농이다.
우리가 이미 체험했듯이, 기후재난은 이미 시작됐다. 역사는 재난이 닥쳤을 때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할을 증언한다. 민주주의는 평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가 왔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아르마티아 센은 민주주의 정부가 있는 곳에서 “대기근이라 부를 만한 사태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대기근은 “고대왕국이나 근대적인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독재체제, … 편협한 일당독재체제에 놓인 신흥 독립국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르마티아 센, <센코노믹스> 82) 사회 체제가 민주적일수록 위기로 생겨난 고통이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지 않고 제한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기후위기가 심할수록 체제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지구 가열, 기후변화와 기후재난, 모두 너무 거대한 문제다. “내가, 우리가 어떻게 한들 이 현실이 과연 바뀔까?”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널리 퍼진 이러한 생각이 오늘의 현실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파국을 향해 거침없이 흘러가는 듯한 세상을 보면, 그냥 이 흐름에 나를 맡기고 싶은 유혹도 크다. 그러나 쓰레기 같이 변해가는 세상이라고 내 삶도 쓰레기로 만들 까닭은 없다. 온 우주에서 한 번뿐인 내 삶은 이런 현실에서도 여전히 소중하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떠올려본다. 당시의 정치, 종교 권력은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세상의 현실을 파악하고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필요한 일을 ‘그냥’ 하셨다. 예수님은 ‘가능성’이 아니라 ‘당위성’을 사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뱀처럼 슬기롭되 당위성을 살아야 한다. 그만큼 급진적(radical)이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급진적이어야 현실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것을 하고, 나머지는 ‘그분’께 맡겨드리자. 예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이 종말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십자가의 길로 가지 않으면 부활도 없다는 진실을 일깨우며 예수님을 따르라고 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조현철(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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