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기후위기의 근원과 전환
조현철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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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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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프란치스코 교종은 회칙 <찬미받으소서(LS)>에서 생태 문제에 “인간적 사회적 차원을 분명히 존중”하며 접근하는 ‘통합 생태론’을 제안한다(LS 137항).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기후위기 또한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다(LS 139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의 라즈 파텔도 기후위기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강조한다. “마법 같은 해결책은 없다. 만약 기후변화의 싸움에서 이긴다면, 칼을 천 번은 휘둘러 얻은 승리일 것이다. 칼은 다양한 부문에서 휘둘러야” 한다. (라즈 파텔 <경제학의 배신> 251)
자본주의, 기후위기의 근원
기후위기는 불평등, 젠더, 인종, 식민주의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얽혀있는데, 이 다양한 문제의 근원은 ‘자본주의’로 수렴된다.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 156 참조) 나오미 클라인이 자신의 저서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의 부제 ‘자본주의 대 기후’로 천명했듯이 기후위기는 자본주의 문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력과 자연의 자원을 최대한 저렴하게 추출하여 생산과 소비에 동원함으로써 이윤을 최대화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삶과 자연이 함께 훼손되었고 경제성장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의 증가로 지구가 뜨거워져 기후위기가 닥쳤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삶의 총체적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하는 ‘성장’의 역학에서 비롯한다. 기업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한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성장하지 않으면 사회적 고통이 커지는 체제로서 구조적인 성장 압박 요인이 내재한다. 시장에서 경쟁하며 이윤을 최대화하는 기업은 언제나 노동생산성 향상에 매달린다. 생산성이 올라가면 생산에 필요한 총노동량이 감소하여 생산 비용이 감소하고 이윤은 늘어난다. 또한, 상품 가격을 내려 시장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고용 수요가 감소하면 사회적으로 실업 요인이 증가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른바 ‘생산성의 함정’이다. 경제 규모를 동일하게 유지하고 계속해서 생산성을 향상하면 실업자는 늘 수밖에 없다. 실업자가 많아지면 사회 전체의 구매력이 떨어져 상품이 덜 팔리고 기업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요약하면, 생산성 향상은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개별 기업으로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로는 실업자가 늘어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생산성 향상으로 실업자가 느는 것을 막으려면 일자리를 늘려야 하고, 일자리를 늘리려면 생산을 늘려야 한다. 팔리지 않는 것은 생산하지 않으므로 생산을 늘리려면 소비를 늘려야 한다. 이 생산과 소비의 증가가 바로 성장이다. 그러니까 필요가 늘어서가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려고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개별 기업은 성장함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거둔다. (조현철, <JPIC, 예언자의 세상 읽기> 104-106)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수단이 아닌 목표다. 무엇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성장이다. 성장이 숙명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장이 곧 발전이요 진보’라는 ‘성장 신화’가 생겨났다. 성장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믿음, 많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믿음, 성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 미국의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가 말했듯이 “성장은 모든 배를 뜨게 하는 밀물”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지배한다.
자본주의 성장 체제에서 소비주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생태적 부담과 피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생산과 소비를 늘리는 성장은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을 뜻하고, 생산·유통·소비·폐기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비롯한 쓰레기와 오염물질 배출도 늘어난다. 성장은 결국 우리가 이전보다 자연에서 물질을 더 많이 추출하여 생산하고 소비했고 그래서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계속 성장하는 한, 우리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적기에 필요한 만큼 줄일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체의 작동 기제에 따라 자기의 터전을 먹어치울 때까지 성장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기계론적 세계관, 기후위기의 근원
성장을 쫓는 자본주의는 소수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주었지만, 다수의 삶은 피폐해졌고 불평등은 늘어났다. 자연은 파괴되고 기후위기가 닥쳤다. 이들 문제는 우리 대다수가 자본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더 복잡해지고 해결하기 어렵게 된다. 근대 이전, 동양과 서양은 자연을 생명의 원천, 일종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여기는 유기체적 세계관이 지배했다. 자연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유기체적 세계관은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제어하는 기능을 했다.
16세기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는 하늘을 관찰하며 우주를 생명이 없는 ‘죽은’ 물질로, 우주의 변화는 기계적 질서와 운동으로 이해했다. 17세기, 데카르트는 세계를 사유 주체와 사유 객체, 정신과 물질로 분리하여 인식하는 철저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정초했다. 물질은 연장(res extensa)을 뜻했고, 연장은 길이·넓이·깊이를 가진 것을 총칭했다. 세계는 다양성과 고유성, 생명을 잃고 물질이라는 단일 범주로 균질화되었다. 세계는 물질과 기계적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계로, 세계의 모든 것은 기계의 부품으로 여기게 되었다. 유기체적 세계관을 대체한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물질로 여김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동 제어 장치를 제거했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물(水)을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보면 물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대하게 된다. 반면, 화학 기호 H₂O로 여기면 물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작해도 되는 물질이 된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물질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제 인간에게는 물질인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힘, 자연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의 획득이 과제로 남았다.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바로 이 힘을 안겨주었다. 데카르트는 자연의 탐구로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된다고 말했다. 베이컨이 말했듯이 ‘아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힘이다. 힘이 생긴 인간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하여 자연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뽑아내는 데 몰두했다(LS 106항 참조). 과학 기술은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했고, 그 결과 온실가스 배출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생태적 회심,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생태론적 세계관으로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고 다루어 온 방식을 생각하면 기후 위기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기후위기는 성장을 압박하는 구조적 요인이 내재한 자본주의 체제와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물질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물질주의적 성장이 근원인 기후 문제는 기존의 성장 패턴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성장 신화가 공고해졌고 성장의 대안을 생각할 상상력은 고갈되었다.
오늘날 다수인 성장 신화의 추종자는 성장을 벗어나자는 접근 방식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실상을 외면하는 성장 신화야말로 비현실적이다. 무엇보다 기후 문제는 이제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강하게 경고한다. 더구나 ‘이스털린의 역설’이 보여주듯 일정 수준을 지나면 성장은 삶의 질 향상과 무관해진다. 성장할수록 행복도나 만족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신체의 열량 섭취에 빗대자면, 한 개인의 건강 유지 비결은 과소도 과잉도 아닌 균형 섭취에 있다. 섭취하는 열량이 부족하면 몸이 허약해지지만, 계속해서 많이 섭취하면 비만이 된다. 한창 성장할 때가 지나면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균형 있게 먹느냐가 건강의 관건이다. (팀 잭슨, <포스트 성장 시대는 이렇게 온다> 128-130) 세계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나라가 성장할 때는 벌써 지났다.
기후 문제는 보이지 않는 쓰레기(waste)인 온실가스의 과다 배출, 곧 낭비(waste)의 문제다. 쓰레기 과다 배출과 낭비는 생산과 소비 양식, 곧 소비주의 생활양식의 문제다. 소비주의는 ‘저기’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안팎에 있고, 상대할 대상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다. 성장의 대안을 찾기 어려운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성장의 대안을 찾고 실천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변화, 생태적 회심이 필요하다.
어원상 회심(μετάνοια)은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변화한다. “근본적인 변화를 바란다면, 사고방식이 우리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LS 215항). 생태적 회심은 기존의 인간관계를 넘어 “생명, 사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여 세상의 근본적 변화를 이끄는 내적 변화다(LS 215항). 기후 문제의 맥락에서 말하면, 생태적 회심은 생산과 소비 양식에서 비롯하는 사회·생태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겠다는 결단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연과학은 기계론적 세계관과 전혀 다른 세계상을 제시했다.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Big Bang)’이라 부르는 대폭발로 시작했으며 우주 만물은 빅뱅 이후의 수많은 생성과 변화의 과정으로 생겨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구 또한 이 과정에서 약 40억 년 전에 생겨났다. 빅뱅은 만물의 공동 기원이며 모든 것은 서로 존재와 생명 차원의 근원적 유대로 연결된다. 현대 과학의 세계상은 기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 곧 ‘집’에 가깝다.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οἶκος)’에서 파생한 ‘에콜로지(ecology)’를 ‘생태(학)’로 옮기므로 세계를 집으로 보는 관점은 생태론적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다.
생태적 회심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생태론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일이다. 생태적 회심으로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동의 집”이 된다(LS 1항). 집 안의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의존하는 집에서 모든 것은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있다. 어떤 것이든 “유용성보다 존재”가 먼저다(LS 69항). 생태적 회심으로 우리는 네가 안녕하지 않으면 나도 안녕할 수 없고, 개인의 안녕은 세상의 안녕 없이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도 같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세계를 물질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연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빼내라고 부추긴다면, 세계를 집으로 보는 생태론적 세계관은 자연을 존중하며 대하라고 권고한다.
세계의 인식 방식을 바꾸는 생태적 회심은 배타적 자기 증식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행동 양식을 거부하는 결단이기도 하다. 생태적 회심으로써 우리는 성장이 진보이고 발전이라는 성장 신화를 거부하고, 소비가 미덕인 소비사회에서 “적은 것이 많은 것”임을 확신한다(LS 222항). 아무리 자본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이 지배한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을 벗어나 타자를 향할 수 있는 능력”, 자기를 절제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능력이 있다(LS 208항). 인간에게는 “탈아(ἔκστασις)의 법칙”이 내재한다(<모든 형제들> 88항). 절제와 배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희생되는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배려하는 단순과 검약, 호혜와 환대의 삶으로 구현된다. 절제와 배려의 태도를 수반하는 생태적 회심은 폭력적인 소비문화를 “돌봄의 문화”로 바꾸는 출발점이다(LS 231항).
조현철(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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