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경제 발작 시대

김정대SJ 121.♡.235.108
2023.03.20 18:22 2,39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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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3년과 2004년에 미국 워싱턴 D.C 조지타운대학교의 부설 연구기관 우드스톡 테올로지칼 센터(Woodstock Theological Center)’에서 주최한 세계화의 영향이란 연구 프로젝트에 한국의 노동자들이 겪는 세계화의 영향에 대해서 면접 조사한 사례를 발표했고, 그 분석 작업에 참여했다. 그때 서강대학교에서도 강의했던 데니스 맥나마라(Dennis McNamara, S.J.) 신부님이 조지타운대의 사회학과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학부 3, 4학년을 대상으로 근대성Modernity’이란 과목을 개설해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경제적 근대화의 모델로 꼽히는 한국과 그밖에 다른 몇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경험을 들려주고자 특강 시간을 마련했다. 나는 경제학이나 사회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원과 함께 그 특강의 발표자로 초대받았다. 맥나마라 신부님은 발표자들에게 내가 경험한 근대화그리고 근대화 과정의 어두움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관해서 관심을 두게 되었다.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1961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였고, 이듬해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베이비붐 세대인 나의 삶은 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경제개발 광풍의 소용돌이를 일방적으로 수용했고, 청년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그 광풍의 어두움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근대화는 단적으로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가난을 박멸하여야 한다는 잘못된 신화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놓았다. 이 가난 박멸에 대한 신화의 뿌리가 너무 깊어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게 사는 인간의 모습이 마치 인간의 원형인 듯 착각했다. 잘못된 신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터에 나가 장시간 노동이라는 희생을 감내했다. 국가는 이들을 산업 역군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렇게 장시간의 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개인을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있는 것이라는 일본식 애국주의와 군사문화를 통해서 견고해진 집단주의 때문이다. 소위 국민이라는 국가 구성원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국민교육헌장)에서 표명하듯이 애국주의와 집단주의를 내면화했다. 이런 문화에서 라는 개인은 오로지 집단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개인은 집단의 이념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질 수 없었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가치에 따라 희생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도 정치적 자유도 인권도 다 유보되었고 오로지 경제개발에 몰빵했다. 이렇게 우리는 경제개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수강생 가운데는 한국 출신 이민자도 있었는데 그는 나의 발표 내용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듣던 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 과정과 매우 달라 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사실 우리는 근대화를 이야길 할 때 오직 경제개발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 오직 경제개발의 관점에서 근대화를 축소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과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문화의 문제이고, 제도의 문제이다. 그러니 폭넓은 근대화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는 삶의 질과 관계가 있는 문화와 인간적 가치 그리고 사회제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근대화를 오직 경제적 관점에서의 발전으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희생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이 세계에서 최장 시간의 노동을 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뿐인가?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산업재해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만약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산재 사고가 줄어들었다면 그들의 재해로 인한 피해와 죽음이 의미 있는 희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산업현장에서의 재해와 그로 인한 죽음은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고스란히 희생으로 남았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런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 과정을 경제 발작 시대로 정의하며, “윤리, 도덕, 질서, 책임이 모든 생산 행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고 표현했다. 경제 발작 시대는 모든 것을 생산 행위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생산행위를 위축시키는 가치와 문화, 제도는 불필요하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판된 지 4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아직도 경제 발작 증상을 보인다. 현 정부는 노동자의 안락한 삶은 생산행위를 위축시키기에 이고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정부는 주 52시간의 노동시간 상한제를 폐지하고 주 69시간의 노동이 가능케 하는 노동시간 개편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노동은 삶의 일부이지 삶의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동이 인간을 위해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교황 요한 바오로2, 노동하는 인간, 6)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하는 노동관은 노동을 징벌이 되게 하고, 노동자를 노예가 되게 하고, 인간을 일하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이런 노동관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높여줄 수 없으며 인간으로서의 자기완성도 가능하지 않다. (노동하는 인간, 9)

 

한편 정치, 경제적 기득권자들은 노동조합 활동은 생산행위를 위축시킨다고 발작 증세를 보인다.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귀족노조라는 말을 퍼뜨려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노동조합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노동자와 청년들 사이를 이간질한다. 이는 명백히 폭력과 증오의 연설로 사람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행위이다. 그리고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마치 세상을 뒤집힐 것 같은 공포감을 주는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은 매우 편파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이제 발작을 멈추어야 한다. 자본에 노동이 없다면 그냥 자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는 그저 돈만 씹어 먹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노동이 더해지면 그들의 삶은 윤택해진다. 그러니 노동자를 삶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는 말한다. ‘노동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 (No Work, No Music!) 비슷한 말이다. ‘노동이 없으면 삶도 없다!’ (No Work, No Life!)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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