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현대의 복음선교 1] 반짝인다고 모두 금수저는 아니다: 바오로 6세의 특별한 배경

김민SJ 121.♡.235.108
2022.05.26 16:04 2,8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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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예수회원이자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전기작가인 헤블스웨이트(Hebblethwaite)는 그의 저서 Paul VI: The First Modern Pope에서 바오로 6세를 "최초의 근대적인 교황"이라고 묘사하였다. '근대'라는 단어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별로 탐탁치 않은 용어였다. 예컨대 비오 10세의 경우 1907년 회칙 Pascendi Dominici Gregis에서 정말이지 꼼꼼할 정도로 근대주의에 대해서 다방면에 걸쳐서 비판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모더니스트라는 꼬리표는 옛날 한국사회에서 빨갱이라는 꼬리표처럼 교회에 위험한 인물이라는 불온한 느낌을 주었다. 

헤블스웨이트가 바오로 6세에게 이전시기에 그토록 불길하게 느껴졌던 '근대적'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것은 근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더 이상 교회가 마치 대양 속의 고도처럼 머물수는 없다는 VCII 이후의 문제의식 하에서 바오로 6세가 보여줬던 세상에 대한 개방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6세, 여기에서는 바티스타 몬티니 Battista Montini의 배경은 매우 특이했다. 그는 "신학교에 살지 않았으면서도 서품된 사제이면서 교구 사제 생활을 하지 않고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망있는 교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추기경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 1958년 교황 후보로 거론되었다." (Peter Hebblethwaite, Paul VI: The First Modern Pope, 13) 그런데 이런 특이한 이력에 앞서 그의 청년기 역시 매우 특이하다. 인간 바오로 6세-바티스타 몬티니-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중심을 잡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치열한 노력에 대해서 더 깊은 인식을 얻기 위해 일종의 숏컷을 걷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바티스타 몬티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독특한 초기 이력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의 교우 관계. 

바티스타 몬티니는 금수저 출신이었다. 그것도 바티칸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는 금수저. 기독교 금수저란 무엇인가? 부친인 지오르지오 몬티니는 정치인이자 저널리스트였는데, 그는 자주 교황을 알현할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금수저이긴 했는데 조금은 특별한 금수저였다. 브레시아-이탈리아 북부-에 살던 몬티니 집안은 성탄 때마다 40명의 가난한 노인들을 초대해 만찬을 제공했는데 그럴 때에는 몬티니 집안의 아이들이 서빙을 담당하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사회의 상류층들이 얼마나 노동자나 빈자들의 삶과 철저하게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몬티니 집안은 금수저 중에서도 좀 별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티스타 몬티니가 어린 시절, 수많은 사제들이 몬티니 집안에 들락거렸다. 그중에서 특별히 미래의 교황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쥴리오 베빌라콰 Giulio Bevilacqua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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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리오 베빌라콰 추기경(1981-1965)

 

젊은 베빌라콰 신부가 몬티니 집안에 초대되었을 당시 그는 범상치 않은 교구사제였다. 벨기에 루뱅에서 사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책상물림을 혐오했다. 자유로운 정신을 흠모했던 그는 교구에서 오라토리오회로 소속을 옮겼다. 그는 꼬마 바티스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현대세계 속에서 성령의 징표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바티스타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독서는 결코 자족적인 취미행위이어서는 안되며 현대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방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베빌라콰 신부는 브레시아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활동에 전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군종사제로 이탈리아군에 복무하였다가 1916년 오스트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해방후 그는 계속해서 브레시아에서 노동자의 좋은 친구로 활동하였다. 그는 바티스타 몬티니에게 좋은 스승이면서 벗이었다. 1965년 바오로 6세-꼬마 바티스타 몬티니-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품하였는데, 서품을 주면서 교황은 베빌라콰 추기경을 바로 이 표현, '벗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베빌라콰는 추기경직을 허락하면서 조건을 걸었다. 그것은 추기경이 되었다하더라도 계속해서 브레시아 변두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이 된 베빌라콰는 여전히 소박한 검은색 캐속을 입고 살았다. 추기경이 된지 15주후 그는 브레시아에서 죽었다. 

베빌라콰와 더불어 꼬마 바티스타 몬티니에게는 또 하나의 스승이 있었는데, 파올로 카레사나 Paolo Caresana 신부가 그 인물이었다. 이 양반은 특히 억압받는 농업노동자들을 위해서 사목활동을 벌였던 교구사제였는데, 베빌라콰와 마찬가지로 역시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베빌라콰와 마찬가지로 카레사나 신부는 바티스타 몬티니에게 영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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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반을 연주하고 있는 베빌라콰 추기경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파올로 카레사나 신부

바티스타 몬티니에게 끼친 두명의 인물의 공통점은 사제이면서 오라토리오회 회원이라는 사실 외에도 '사회적 가톨릭주의 social Catholicism'이다. 노동조합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상호부조를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려는 가톨릭내의 친노동자 운동. 

두명의 사제 외에 그에게 가장 영혼의 벗 amico di cuore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안드레아 트레베스치 Andrea Trebeschi였다. 이 둘은 어린 시절부터 같은 예수회 학교를 다녔다. 둘은 정말 친했다. 

바티스타 몬티니. 나의 정말 좋은 친구. ... 그의 영혼은 얼마나 멋진가! 그의 삶은 얼마나 모범적인가! 전적으로 선에 의해서 인도된다.

그의 말은 또 얼마나 선물같고 귀한지! 그는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다. 그는 사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늘 친구가 될 것이다.
                                                                                             -꼬마 안드레아 트레스베치의 일기


안드레아 트레베스치는 오랫동안, 심지어 죽을 때까지 몬티니의 영혼의 친구였다. 둘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그 우정의 깊이가 절절히 느껴질 정도였다. 트레베스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바티스타 몬티니와 함께 La Fionda(새총)라는 이름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중에 그는 법률가 되었고 맹렬한 반파시즘 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곧 가톨릭 내 반파시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44년 1월 6일 그는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다하우와 마우타우젠, 그리고 구센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1월 24일 그는 구센 라거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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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트레베스키. 그가 머물렀던 수용소들의 이름이 보인다.

 

이처럼 바티스타 몬티니의 절친들은 모두 특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베빌라콰는 노동사제였고 카레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영혼의 단짝 트레베스치는 파르티잔으로 활동할 정도로 정치적인 색깔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간 바티스타는 문자 그대로 금수저의 트랙을 밟아갔다. 우선 신학생 시절 주교의 특별대우에 힘입어 신학교 기숙사가 아니라 집에서 통학했다. 물론 집안 덕분이기도 했지만 한참 제1차 세계대전 중이라 산탄젤로 신학원이 군병원으로 사용되었던 탓도 있었다. 약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일반적인 신학교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 

바티스타 몬티니는 매우 병약했는데, 몬티니 가족을 아끼는 많은 주교들은 그의 건강상태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브레시아 주교 쟈친토 가기아 Giacinto Gaggia는 교구사제로 일하다가는 이 전도유망한 청년이 죽어버릴 것을 너무나 걱정한 나머지 로마에서 공부하기를 강권하였다. 가기아 주교는 바티스타 몬티니가 로마 사피엔차 대학에서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공의회 역사를 공부하기를 바랬다. 그에 따르면 공의회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신학과 철학, 영성, 정치, 인문주의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과오들과 논쟁들, 진리와 오류, 거룩함과 덕에 대해서 알게 될 터였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던지 바티스타 몬티니는 자신의 주교의 바람과는 달리 롬바르디아 대학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티칸의 국무성 장관이 끼어들었다. 그는 우리 바티스타가 롬바르디아 대학에서 건강을 해치고 있으니-외교관 학교가 왜 건강에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바티칸 외교관 학교(Academy of Noble Ecclesiastics)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바티스타 몬티니는 순순히 순명하였다. 그는 이제 외교관 트랙을 가게 되었다. 반골기질이 충만했던 베빌라콰 신부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바티스타 몬티니는 교황이 되고 난후 얻게될 햄릿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괴로워하면서도 순순히 장상들의 뜻을 따랐다. 그는 외교관 트랙이 결정된 후 오후 한시간 동안 낑낑대며 수단에 단추를 달고 난후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버튼을 잘 채우는 건 외교관의 삶에 본질적인 요소이긴 하지."

외교관 학교를 마치자 새로운 시련이 다가왔다. 바티칸 국무성의 주세페 피차르도 몬시뇰이 이번에는 교회법 박사를 받으라고 명령하였다. 교황청의 신학교와 대학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그를 위해 모든 시험과 논문을 면제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에 따라 그는 아무런 의미없는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는지 그는 자신을 결코 박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하지만 밖에서 볼 때에는 휘황찬란한 금수저의 삶을 살게 되었던 바티스타에게 시련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바티스타를 너무나 염려한 주세페 피차르도 몬시뇰은 이번에는 폴란드나 페루, 헝가리에 가서 '교황대사의 일이 어떤 것인지 보고' 오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제안을 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티스타가 얼마나 격분했는지 알 수 있다. 

제가 얼마나 반대하고 항의했는지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일은 하지만 내가 왜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 바티스타의 한탄이다. 하지만 결국 바티스타 몬티니는 1923년 폴란드에 가있었다. 금수저의 비애였다. 하지만 폴란드에서도 금수저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교황대사와 당시 대사관에 머물던 저명한 성서학자 죠반니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 바티스타가 폴란드에서 계속해서 외교관의 커리어를 쌓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이 전도유망한 젊은이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사이의 논쟁. 하지만 당시 새로이 즉위한 교황 비오 11세 본인이 바르샤바의 교황대사 출신이기에-하지만 그는 소련과의 연락망을 유지하였다는 이유로 억울하게도 폴란드 국민의 격분을 산 적이 있었다.- 바티스타 몬티니가 계속해서 폴란드 전문가로서의 커리어를 쌓기를 바랬다. 실제로 바티스타 몬티니는 폴란드에 머물면서 폴란드의 독특한 민족주의에 대한 식견을 쌓았고 몇편의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본국에 돌아오라는 바티칸 국무성의 지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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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인생행로의 결정. 금수저의 비애였다. 

 

김민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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